대한불교조계종 상왕산 보원사


유물

대한불교조계종 상왕산 보원사

법인국사보승탑비(法印國師寶乘塔碑)


법인국사보승탑비(法印國師寶乘塔碑) 해석문

고려국(高麗國) 운주(運州) 가야산(迦耶山) 보원사(普願寺) 고국사(故國師) 제증시법인(制贈謚法印) 삼중대사(三重大師) 보승탑비명(寶勝塔碑銘)과 아울러 서문(序文) 광록대부(光祿大夫) 태승(太丞) 한림학사(翰林學士) 전내봉령(前內奉令) 신(臣) 김정언(金廷彦)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짓고, 유림랑(儒林郞) 사천대박사(司天臺博士) 신(臣) 한윤(韓允)이 제지(制旨)를 받들어 비문(碑文)과 전액(篆額)을 쓰다.
공손히 생각컨대 각제(覺帝)인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구시나가라의 사라나무 사이에서 열반하신 후 저군(儲君)인 미륵보살이 용화회상(龍華會上)에서 불위(佛位)를 계승하기까지 대대로 인자(仁者)가 있어 모두 마음은 부처님과 같았으니, 불(佛)이란 깨달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를 스승삼아 의행(依行)하는 까닭에 불교가 증조(蒸棗) 해우(海隅), 즉 동해의 한 쪽 모퉁이에 있는 우리 국민으로 하여금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고 구습(舊習)을 고쳐 새로운 생활을 영위하도록 하였다.
널리 반보산(蟠桃山) 지역으로 넓혀 혜일(慧日)을 도와 거듭 빛나게 하였으니, 즉 도(道)가 높은 존사(尊師)를 왕의 스승으로 삼고 덕이 두터운 큰스님을 중생(衆生)의 아버지로 삼았다. 석씨(釋氏)의 삼장(三藏)에는 육의(六義)가 있는데, 내(內)로는 계정혜(戒定慧)이니 선(禪)의 근본이고 외(外)로는 경율논(經律論)이니 교(敎)의 본원(本源)이 되는 것이다. 이 여섯 가지를 모두 갖추신 분이 있으니 실로 대사(大師)가 그분이라 하겠다.
대사(大師)의 법호(法號)는 탄문(坦文), 자(字)는 대오(大悟), 속성은 고씨(高氏), 광주(廣州) 고봉(高) 출신이다. 조척(祖陟)으로부터 덕(德)을 쌓음이 한량 없으므로 공(功)을 이룸에 넉넉함이 있었다. 일찍이 일동(一同)이 될 만한 장과(長果)를 지었으며, 삼이(三異)의 방부(芳父)를 나타내었다. 아버지는 능히 화현(花縣)을 꾸민 훌륭한 군수(郡守)였고, 난정(蘭庭)에 태어난 빛나는 가문이었다. 드디어 가풍(家風)의 경사를 이어 받아 울창하게 읍장(邑長)의 존령(尊令)이 되었다. 어머니는 백씨(白氏)이니 오직 성선(聖善)의 도를 닦아 훌륭한 (결락) 아들 낳기를 희망하였으며, 부도(婦道)를 받들어 행하고 삼가하여 모의(母儀)를 지켰다. 어느 날 밤 꿈에 한 범승(梵僧)이 나타나 금빛나는 기과(奇菓)를 건네주었다. 그로 인해 임신하고 만삭이 되어 탄생하였으며, 아버지 또한 꿈을 꾸었으니 법당(法幢)이 뜰 가운데 세워져 있거늘, 범패(梵?)가 그 위에 걸려 있어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나부꼈고, 많은 사람들이 그 밑에 모인 것이 마치 둥근 담장과 같았다.
건녕(乾寧) 7년 용과(龍集) 군탄년(?灘年) 8월 14일 새벽 동 틀 무렵에 탄생하였다. 대사(大師)는 태어날 때, 태(胎)가 목을 감아 드리운 것이 마치 방포(方袍)를 입은 것과 같았다. 기이한 골격을 받아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말을 함부로 하지 않고, 불상(佛像)인 금상(金像)을 보면 마음을 경건히 하였으며 상문(桑門)인 스님을 대하여는 반드시 합장하였으니 그 근기(根機)가 자못 성숙함을 볼 수 있었다. 선근(善根)의 싹이 전세(前世)에 이미 자랐으므로 5살 때 벌써 출가하려는 마음이 돈독하여 뜻은 세간진로(世間塵勞)를 여의는데 있었으니 자취를 치문(緇門)에 의탁하고 마음을 금계(金界)에 의거할 것을 발원(發願)하였다.
그리하여 아버지보다 어머니에게 먼저 여쭈었더니, 어머니는 전일(前日)의 태몽을 생각하고는 울면서 허락하였으니, “내생(來生)에는 나를 제도해 줄 것을 원할 뿐 다시는 문(門)에 기대어 자식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어 아버지에게 말씀드리니 흔쾌하게 허락하였다. 스님은 곧 삭발하고는 부모에게 하직하였으며, 마음을 닦아 성불하고자 결심하여 향성산(鄕城山) 대사(大寺)의 대덕화상(大德和尙)을 찾아가 뵈었다. 화상(和尙)이 스님을 보니 봉모(鳳毛) 기상(氣相)이며 나발(螺?)를 지닌 특수한 자태(姿態)를 가졌으므로 경탄하여 말하기를, “바야흐로 동치(童稚)의 나이에 해당하건만 이미 노성(老成)의 덕을 갖추었구나! 자네와 같은 자가 나를 스승으로 삼으면 이는 마치 수주대토(守株待兎)하고 연목구어(緣木求魚) 하는 것과 같다. 나는 네 스승이 될 자격이 없으니 마땅히 다른 큰스님이 있는 곳을 찾아가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은 스님 중에 참된 선지식과 오래된 사적(事跡)을 빼놓지 않고 반드시 심방(尋訪)하리라 하고 떠나려 인사를 드리는데 대덕화상(大德和尙)이 말씀하기를, “옛 노인들 사이에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향성산(鄕城山) 안에 절 터가 있는데 옛날 원효보살(元曉菩薩)과 의상대덕(義想大德)이 함께 머무르며 쉬던 곳이라 한다.”하였다. 대사(大師)가 ‘이미 성적(聖跡)에 대하여 들었으니 내 어찌 그곳 현기(玄基)에 나아가서 수도하지 않으랴.’하고, 마침내 그 구허(舊墟)에 풀집을 짓고, 원숭이 같은 마음을 우리 속에 가두어 놓고, 고삐없는 말과 다름없는 의식은 말뚝에 붙잡아 매고는 여기에 발을 멈추고 마음을 가지런히 하여 수년을 지냈다. 당시 부근 사람들이 성사미(聖沙彌)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대사(大師)가 이에 신엄대덕(信嚴大德)이 장의사(莊義寺)에 주석하면서 잡화경(雜華經)을 설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명공(名公)의 제자가 되어 진불(眞佛)의 법손(法孫)이 되기를 원하여 곧 그곳으로 찾아갔으며, 겨우 시봉(侍奉)을 맡자마자 곧 바로 화엄경(華嚴經)을 수학하며 독송하였다.
스님은 1권을 하루에 다 외우면서도 조금도 혈유(孑遺)함이 없었다. 엄공(嚴公)이 법기(法器)라 여겨 크게 기꺼워하면서 말하기를, “옛 스님이 이르기를, ‘각현(覺賢)이 하루에 외우는 분량은 30명의 분량과 맞먹었다.’고 하였으니, 뒤에 출발하여 먼저 이른다는 말이 장차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과연 그런 사실을 경험하였다.”고 하였다. 정성껏 스님을 시봉하며 공부하여 그 진취가 날마다 향상하였다.
용수(龍樹)가 사람을 교화하였다는 설화(說話)를 곧 마음으로 실감하였으며, 부처님께서 도(道)를 논구(論逑)하신 이야기를 어찌 눈으로 보는 것이 어려운 일이겠는가. 비록 그와 같이 묘각(妙覺)하였지만 오히려 율의(律儀)에 치중하였다.
15세 때 드디어 장의산사(莊義山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게 되었다. 초율사(初律師)가 꿈에 한 신승(神僧)을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새로 수계(受戒)하려는 사미(沙彌) 중에 ‘문(文)’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있을 텐데 오직 이 사미는 비상한 사람이다. 그는 법(法)에 있어 화엄경(華嚴經)의 대기(大器)이니 어찌 몸을 수고롭게 하여 수계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꿈에서 깨어 수계자(受戒者)의 명단을 찾아보니 대사(大師)의 이름이 바로 탄문(坦文)으로 문자(文字)가 바로 그것이다.
율사(律師)가 기이하게 여겨 앞에 꿈을 꾼 이야기를 하며 말하기를, “신인(神人)이 이미 경계하였으니 그렇다면 구족계(具足戒)를 품수(稟受)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대사(大師)가 말하기를, “저의 마음이 돌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닌데 어찌 한 번 수계하려고 먹은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원하옵건대 불타(佛陀)의 법손(法孫)이 되려면 마땅히 보살계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계(戒)의 향기, 즉 계(戒)를 드디어 받고 나서는 행(行)의 잎이니, 즉 실천이 더욱 아름다웠다.
이로 말미암아 구고(九皐)까지 소리가 들리고 천리(千里)까지 응(應)하였다. 그러므로 태조(太祖)는 대사(大師)가 치문(緇門)의 발화(拔華)이고 각수(覺樹)의 혜가(慧柯)이므로 칙제(勅制)를 내려 이르기를, “이미 유년(幼年)에 기이함을 보여 호를 성사미(聖沙彌)라 하였으니, 금일에는 그 신기함을 나타내어 별화상(別和尙)이라 일컫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이름을 감추지만 이름이 나를 따라 나타나고, 칭성(稱聲)을 피하지만 그 칭성이 나를 따라 더욱 퍼진다는 말이다.
용덕 원년(龍德 元年)에 해회(海會)를 설치하여 승과(僧科)로 치도(緇徒)를 선발하였다. 이 때에도 왕이 교지를 내려 이르기를, “장의사(莊義寺)에 별화상(別和尙)이 있는데 어찌 스님을 제쳐놓고 따로 뽑을 필요가 있겠는가.”하고 바야흐로 스님을 명승(名僧)으로 정(定)하고 발탁(拔擢)하여 문법(問法)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하는 맹주(盟主)로 삼았으니, 비유컨대 대종(大鐘)을 치자 웅웅하면서 크게 울리는 것과 같았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동광기력(同光紀曆) 병술년(丙戌年) 겨울 10월에 태조의 후궁(后宮)인 신명순성왕태후 유씨(神明順聖王太后 劉氏)가 임신을 기하여 좋은 태몽(胎夢)을 꾸었으므로 그 일편단심을 바쳐 옥유(玉裕)와 같은 영자(英恣) 낳기를 발원하고는 드디어 대사(大師)를 청하여 법력(法力)을 빌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금향로에 향을 피우고 독경하면서 웅파(熊罷)의 길몽(吉夢)으로 달산(?産)과 같이 순산하도록 기원하였다. 그러한 공덕으로 과연 일각(日角)을 가진 기자(奇恣)와 천안(天顔)과 같은 이상(異相)을 가진 태자를 낳았다.
단정히 학금(鶴禁)에 거하여 홍도(鴻圖)를 이어받아 수호하였으니 그가 바로 대성대왕(大成大王)이다. 실로 대사(大師)는 부처님을 터득한 마음이 깊고 하늘을 받드는 힘이 돈후(敦厚)하여 묘감(妙感)은 후세(後世)에 넉넉히 끼쳤으며, 현공(玄功)은 왕(王)의 밝은 덕(德)을 이어가게 하였다. 그러므로 태조(太祖)가 심히 가상히 여겨 조칙을 보내어 노고(勞苦)에 우대하였다.
그 후 구룡산사(九龍山寺)로 옮겨 화엄경을 강설하였는데 많은 새들이 방 앞에 둘러 있고 호랑이가 뜰 밑에 엎드려 있었다. 문인(門人)들이 모두 떨면서 두려워하였으나, 대사는 편안한 얼굴로 침착하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조용히 하라. 이 진귀한 새와 기이한 짐승들은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에 귀의하려는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다음 해 봄 대사의 행(行)은 초계비구(草繫比丘)의 마음을 닦았고 덕(德)은 화엄종(華嚴宗)의 종장(宗匠)들 중에 수장(首長)이었으니, 스님을 발탁하여 별대덕(別大德)이란 법칭(法稱)을 바쳤다. 이 때 스님은 높은 도덕과 예리한 변재로 사부대중을 제접(提接)하였다. 이로부터 법문(法門)을 청하는 자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문도(門徒) 또한 번창하였다. 태조(太祖)가 바야흐로 삼국(三國)을 규합하고 상교(象敎)를 존숭하였다.
청태년초(淸泰年初)에 서백산(西伯山) 신랑(神朗) 태대덕(太大德)이 각현이 번역한 80권본(卷本) 화엄경에 정통하여 방대광(大方廣)의 비종(秘宗)을 설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대사는 나이가 이미 상유(桑楡)에 임박하고, 모양은 마치 포유(蒲柳)와 같이 쇠잔하였다. 그러나 대사(大師)에게 청법하니 낭공대사가 법상에 올라 앉아 옥병(玉柄)을 휘두르면서 금언(金言)을 설하여 심법(心法)을 들려주고 있었다. 드디어 서백산(西伯山)으로 가서 삼본(三本) 화엄경의 강설을 듣고는 크게 감동하여 “어찌 이것이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밀전(密傳)하고, 유마거사가 문수보살과 묵대(?對)한 것과 다르겠는가!”라고 하였다. 낭공대사(朗空大師)가 부끄러운 얼굴로 대답하기를, “옛날 유동(儒童)보살이 이르기를, ‘나를 일으킨 자는 상(商)이다.’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화엄대교(華嚴大敎)가 이때부터 크게 성행하였다.
천복(天福) 7년 7월 염·백(鹽·白) 2주(州)에 연접된 경계에 해충인 황벌레가 농작물의 싹을 마구 뜯어 먹고 있었다. 그리하여 퇴충기도(退?祈禱)를 위해 대사(大師)를 법주(法主)로 모시고 『대반야경(大般若經)』을 강설하기로 하였다. 스님이 여시아문 운운(如是我聞云云)으로부터 일음(一音)으로 겨우 법을 연설하자마자 모든 해충들이 물러갔으며, 그 해에 풍년이 들어 태평(泰平)을 이루었다.
혜종(惠宗)이 보위에 올라 3본 화엄경의 사경을 마치고 천성전(天成殿)에서 불상과 신중상(神衆像)을 모시고 법회(法會) 장소를 마련하고는 대사(大師)를 초청하여 경을 강설하고 또한 열람(閱覽)하는 한편 사경에 대한 경찬(慶讚)을 위해 널리 보게(寶偈)를 선양하였다. 왕이 대사와 사자(師資)의 인연을 맺고는 대사에게 올리는 시주금(施主金)을 구룡산사로 보내고, 따로 법의(法衣)와 진귀한 찻감, 선향(仙香) 등을 송증(送贈)하였다.
정종(定宗)이 즉위해서는 마침내 구룡산사에 법회를 열고 대사(大師)를 법주로 삼아 그의 법력(法力)에 의뢰(依賴)하였으니, 군림(君臨)에 따른 복이 되게 하려 했다. 대성대왕(大成大王)이 즉위하고서는 더욱 십선행(十善行)을 닦고 보다 삼귀의(三歸依)에 정성스러웠다. 우러러 소박한 충정을 펼치며 일편단심을 배증(倍增)하였다. 임금께서 항상 스님의 모습을 보되 마치 부처님의 거룩하신 존안(尊顔)을 첨앙하는 것과 같이 하였다.
대사(大師)를 초청하여 법력(法力)을 빌었으니, 대사는 마치 승천대사(僧泉大師)가 왕 앞에서 주미(?尾 : 拂子)를 흔들고 혜필선사(惠弼禪師)가 왕이 초청한 법상(法床)에 앉아 용이(龍? : 턱)를 움직인 것과 같이 왕이 즉위한 깊은 공덕을 선양하고 나라를 치화(治化)할 묘법(妙法)을 강설한 탓으로시대는 강녕(康寧)하고 왕도(王道)는 태평스러워서 국가는 부강하고 가정은 창성하였다.
대사는 엎드려 대왕을 위하는 한편 부처님을 받들었다. 옥게(玉偈)를 선설(宣說)하여 법왕(法王)의 도(道)를 흠숭하였고, 군자의 나라를 빛나게 하려고 석가(釋迦) 주불(主佛)과 좌우보처(左右補處) 등 삼존(三尊) 금불상을 조성하였다. 광종이 임금이 되어 나라를 다스린 지 4년 째 되던 해 봄에 대사(大師)는 부처님 사리 3과를 얻어 유리 항아리에 담아 법당(法堂)에 안치하였다.
그로부터 수일(數日)이 지난 후, 어느날 밤 꿈에 일곱 분의 스님이 동방(東方)에서 왔다면서 말하기를, “이제 스님께서 묘한 원력(願力)이 함께 원만하고, 영자(靈恣)로 온 나라를 두루 교화하므로 찾아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꿈에서 깨어 항아리를 보니 사리가 빙빙 돌아서 삼(三)으로 (결락) 되었다. 地 (결락) 金之刹에 보천(補天)하는 연석(練石)으로 탑감(塔龕)을 세웠으니, 그 까닭은 임금의 수명을 연장(延長)하고, 왕의 선정(善政)과 덕화(德化)를 부호(扶護)하려는 것이다.
현덕(顯德) 2년 여름에 대사(大師)는 법체가 정상(定常)을 어겨 불편하여 찡그린 얼굴로 질병을 보였다. 어느 날 밤 꿈에 거사(居士) 30여 명이 배를 몰고 와서 “대사(大師)를 배에 모시고 서방극락세계(西方極樂世界)로 가려고 왔습니다. ”고 하였다. 대사가 이르기를, “이것이 내가 타고 서방(西方)으로 갈 반야용선(般若龍船)이구나.”하고, 다시 말하기를, “정성껏 천교(天敎)를 펴서 널리 고해중생(苦海衆生)을 제도하려 하였으나, (결락) 내가 세상을 떠나는 때가 어찌 그다지도 급히 다가왔는가.”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거사(居士)들이 다음 시기로 미루고 배를 되돌려 돌아갔다. 그 후 수명이 오래 연장되어 화엄종지를 더욱 왕성하게 폈으니, 이는 정신이 몽매(夢寐)에 통하고 영혼(靈魂)이 유명(幽明)을 경험한 것이다.
대사(大師)께서 문인(門人)들에게 이르기를 “성군(聖君)이 나를 스승이라 일컬으므로, 나는 부처님의 가호(加護)로 임금께 보답하려 하노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부처님을 존숭(尊崇)한 공덕으로 옥황(玉皇)의 만수무강을 빌기 위해 삼존(三尊) 금불상(金佛像)을 조성하였다.
이로 인하여 성업(聖業)의 치적(治績)이 봉력(鳳曆)에 실어 오직 홍도(鴻圖)를 새롭게 하려 하였다. 유혁건(有赫乾) (결락) 대내(大內)에 대장경 법회를 열고, 급히 지검(芝檢)을 보내어 주궁(珠宮)으로 초빙하였다. 대사(大師)는 산사(山寺)의 연비(蓮扉)를 떠나 경사(京師)의 금지(金地 : 절)에 도착하였다. 대왕(大王)이 높은 스님과 중신(重臣)의 사신을 보내서 내도량(內道場)으로 영입(迎入)하여 융숭하게 대하는 예우(禮遇)가 더욱 돋보이고, 부처님과 같이 공경하였다. 따로 마납가사(磨衲袈裟)와 아울러 백마노염주(白碼瑙念珠)를 헌납하였다. 그리고 이 해 9월에 새로 귀법사(歸法寺)를 창건하니, 그 환경이 물은 잔잔하게 산을 구비구비 돌아 흐르고 산은 험준하여 청룡·백호가 병풍처럼 휘감아 전망이 확트였다.
불상을 모신 전당(殿堂)은 (결락) 이에 개사(開士)가 연거(宴居)하기에 알맞는 정경(淨境)이며, 진인(眞人)이 서식(栖息)할 만한 청재(淸齋)이므로 대사를 초빙하여 주지(住持)하도록 하였다. 대사(大師)가 이 절에 가서 거주하니 장엄하기가 마치 화성(化城)과 같았다. 별도로 계금가사(?錦袈裟)와 아울러 법의(法衣)를 송정(送呈)하였다.
저후(儲后)도 우리 스님을 신향(信向)하였으니, 그 정성스러움이 부왕(父王)인 광종(光宗)과 다름없었다. 저후도 역시 따로 법의(法衣)와 아울러 한(漢)의 명차(茗茶), 만(蠻)의 선향(仙香) 등을 헌증하였다. 그리고 이 해 10월에 대왕이 대사를 석문(釋門)의 종주(宗主), 중생이 살아가는 험한 길의 도사(導師)로 섬겼으며, 스님은 달람(?纜)의 비종(秘宗)을 연설(演說)하고 부상(扶桑)의 생민(生民)을 교화하였다. 이러하므로 왕이 스님의 도덕(道德)을 존중하고, 깊은 대자대비에 감득(感得)하여 치(緇)와 소(素)의 중사(重使)를 보내 소(疏)를 받들고 가서 왕사(王師)로 모시고자 간청했다.
대사(大師)는 이에 사양하며 말하기를, “나는 아직 마음의 구슬이 밝지 못하고 눈의 거울이 비춤이 없어 그릇 왕사(王師)가 되는 것이니 소승(小僧)이 어찌 감히 받아드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대왕(大王)이 말하기를, “과인이 스님을 높은 산처럼 앙모(仰慕)함이 어찌 하루라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장차 혼돈(混沌)의 근원을 묻고자 하오니 이는 공동(??)의 초청에 간절한 마음이다.”하였다.
대사가 말하기를, “소승은 오직 마음을 귀불(歸佛)에만 둘 뿐이요, 진실로 임금님을 돕는 데는 무력(無力)하오나 오히려 지나친 성은(聖恩)을 입어 더 이상 굳게 사양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이에 태상(太相)인 김준암(金遵巖) 등으로 하여금 휘호(徽號)를 받들게 하여 왕사(王師) 홍도삼중대사(弘道三重大師)라 하고, 다음 날 대왕이 몸소 내도량(內道場)에 나아가서 절하고 왕사(王師)로 삼았다. 이 때 “임금이 되어 나라를 경륜(經綸)하는 방법은 하늘을 법받아 항상 주의하고,부처님께 귀의(歸依)하여 사람을 교화(敎化)하는 도(道)를 배웠고, 바다와 같이 깊이 심불(心佛)을 관(觀)하셔야 합니다.”라고 한 다음, 약언(藥言)으로써 드날려 잠계(箴誡)를 베풀었다. 그러한 까닭에 스님의 법력을 우러러 의지하여 정심(精心)을 배나 더하였으며, 따로 계금가사(?錦袈裟)와 더불어 황흑마노염주(黃黑碼瑙念珠)를 헌납하기도 하였다.
개보(開寶) 5년 대사(大師)는 특히 제후(儲后)의 나이가 학수(鶴壽)와 같아 날마다 용루(龍樓)를 왕성하게 하며, 옥의(玉?)를 붙들어 아름다운 덕을 쌓게 하며, 요도(瑤圖)를 도와 항상 경사스러움을 연설하였다. 천불도량(千佛道場)에 들어가 향을 사르고 기도하던 중, 7일 째 되는 날 밤 꿈에 5백명의 스님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스님의 소원을 부처님께서 들어주셨음을 알려드리니, 화사(畵師)를 청하여 오백나한(五百羅漢)의 탱화를 그\려 안선보국원(安禪報國院)에 모시도록 하십시오.”라고 권했다. 대사(大師)가 꿈에 이 같은 지시를 받고 말하기를, “옛날 내가 보원사(普願寺)에 있을 때, 삼본(三本) 화엄경(華嚴經)을 봉지(奉持)하고, 날마다 중야(中夜)에 불상을 모신 법당에서 경행(經行)하기를 몇 년을 계속하였다. 홀연히 어느날 밤 삼보전(三寶前) 객실(客室) 앞에 한 스님이 있기에 ‘스님은 어디서 오셨습니까?’라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성주원(聖住院)에 주지(住持)하는 오백승(五百僧)인데 인연따라 제각기 지나게 되어 이 곳을 경과하게 되었으니, 원컨대 여기에 머물도록 해주십시오.’하고 입방(入榜)을 요청하였다. ‘지객(知客)인 삼보(三寶)에게로 가라’고 하였는데 발을 씻고 내 방 쪽으로 가기에 내가 먼저 방으로 돌아가서 들어오라고 청하였으나 응하지 않고 어디론가 가버렸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고 하였다.
다음 날 아침 사존(司存)에게 “어제 밤에 객스님이 온 적이 있었는가?”라고 물었더니, 사존(司存)은 “밤새도록 아무 스님도 온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다만 뜰에 가득 범의 발자국만 있을 뿐이으로 “내가 십만게(十萬偈)인 잡화경(雜華經)을 봉지(奉持)하고 옥상(玉像)에 귀의한 탓이며, 오백나한이 연궁(蓮宮)에 강림한 까닭으로 영자(靈恣)를 감득(感得)하게 된 것이다.”하였다. 그 후 이 성스러운 나한(羅漢)의 덕을 갚기 위하여 해마다 춘추가절(春秋佳節)에 나한(羅漢)의 묘재(妙齋)를 베풀게 되었는데, 그 까닭은 그렇게 할 만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므로 제자들이 이를 항례(恒例)로 기록하였다.
개보(開寶) 8년 정월(正月)에 스님은 쇠모(衰貌)에 해당되어 고산(故山)에 돌아가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대왕은 오히려 스님의 자안(慈顔)과 이별하는 것이 아쉬워 개성에 있는 귀법사(歸法寺)에 주석(住錫)하도록 청하였으니, “말니(末尼)상진(上珍)이 그 빛을 감추어 깊은 산중에 있는 것이 옳다고만 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인간 세상에 나타내 보이셔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환하게 비추어 주는 것이 제자의 소원이다.”라 하였다. 대사가 말하기를, “소승의 몸이 벽동(碧洞)에서 지내지 아니하고 화려하고 복잡한 경도(京都)에서만 살고 있으니 해마다 청산이 눈 앞에 선하며, 날마다 다만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유위법(有爲法)에만 반연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대왕이 비록 옥호(玉毫)를 연모하나 보원사(普願寺)로 돌아가려는 발걸음을 멈추게 하기는 어려웠다. 이에 대사를 위하여 구름과 더불어 동심(洞心) 속에 서식(栖息)하게 하였으니, 마치 달과 함께 허공에 있는 것과 같았다. 그 지혜(智慧)는 일방(一方)을 교화하고 그 교화(敎化)는 사방(四方)으로 멀리 향기로왔으니 군신(君臣)이 찬앙(鑽仰)하고 나라의 사범(師範)이 되기에 마땅하다 하겠다. 모두가 보월(寶月)의 광명(光明)을 품고 다 같이 자운(慈雲)의 그늘 밑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니, 금생(今生)에 서로 만남이 다겁생(多怯生)의 인연이라 여겨공경하는 태도는 겸겸(謙謙)하고 말과 생각은 간간(懇懇)하였다. 휘호(徽號)를 받들어 국사(國師)가 되어 달라고 청하였으나 대사(大師)가 늙고 병 들었음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그러나 대왕은 마음을 기울여서 다시 간청하였다.
대사가 말하기를, “소승은 도를 닦은 공이 미미하고, 스승이 될 만한 덕이 옅음에도 불구하고 성은(聖恩)을 입음이 적지 않았으므로 과분한 요청이지만 더 이상 사양할 수 없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왕이 몸소 도량에 나아가 조복(朝服)을 입고 면류관을 쓰고는 대사에게 예배하고 피석(避席)의 의(儀)를 갖추어 서신(書紳)의 예(禮)를 편 다음, 도를 물어 말씀해 주기를 빌었다. 대사가 말하기를, “소승은 다만 금생(今生)의 인연이 포류(蒲柳)의 앞에 당하였고 쇠퇴함은 연라(煙蘿)의 정경(靜境)에서 쉬고자 할 뿐이다.
몸은 비록 소나무 밑에 있으나 마음은 항상 예궁(?宮)에 있어 우러러 용안(龍顔)을 연모하여 오직 대왕의 봉작(鳳作)을 빌고 있을 뿐 이다.”하였다. 이 말을 들은 대왕(大王)은 감사하여 말하기를, “법운(法雲)이 이은 그늘에 감로(甘露)를 계속 뿌려 제자(弟子)도 법화(法化)를 입어 멀지 아니합니다.”라고 하며, 정성을 바치되 더욱 간절하였다. 이제 이별하게 되어 행장(行裝)을 갖추게 하고, 자라법의(紫羅法衣)와 승가(僧伽)의 모자, 자색(紫色) 실로 삼은 신발, 운명차(雲茗茶), 천향(天香), 상렴(霜?), 무곡(霧?) 등을 드리는 한편, 승유(僧維)인 석혜윤(釋惠允)과 원보(元補)인 채현(蔡玄) 등에게 명하여 호위 전송하도록 하고, 대왕(大王)은 백관(百官)을 인솔하고 동쪽 교외의 조석(祖席)까지 행행(幸行)하여 송별연(送別宴)을 베풀고 친히 다과를 올리는 등 성총(聖寵)을 극진히 하였다. 대사(大師)의 문하승(門下僧) 중에 명망이 있어 대사(大師)와 대덕(大德)이 될 만한 이가 20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남쪽 들판의 토지 1,000경(頃)과 노비(奴婢) 50명을 바쳤는데, 국사(國師)가 감사하며 말하기를, “넉넉히 성택(聖澤)을 더하여 스님들에게 지극한 존경과 공양을 베풀었으니, 이는 천생(千生)동안 받을 복이므로 헛되지 않을 것이며, 길이 만겁(萬劫)동안 닦은 공덕(功德)이니 어찌 그 수승(殊勝)함을 이루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임금께서는 절을 하고 말하기를, “제자는 스님의 자비하신 위력에 의하여 몸을 닦으며, 묘법(妙法)에 귀의하여 사람을 교화(敎化)하겠으니, 간절히 스님께 바라옵건대 처음 가졌던 그 마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경읍(京邑)으로 오시어 길이 길이 자비하신 지도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대사가 말하기를, “전생(前生)에 맺은 인연으로 금생(今生)에 폐하(陛下)의 국토에 태어나서 황왕(皇王)의 은혜를 입은 것이 너무나 지중(至重)하여 창해(滄海)의 깊음으로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제 고산(故山)에 돌아가 만약 여천(餘喘)의 연장을 얻게 된다면 곧 바로 운궐(雲闕)로 돌아와서 다시 천안(天顔)을 대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만, 만약 흘러가는 물을 붙잡아 둘 수 없는 것처럼 남은 여생(餘生)을 머물게 하지 못한다면, 바라건대 내생(來生)에는 다시 사문(沙門)이 되어 더욱 법연(法緣)을 증험하고, 우러러 왕화(王化)의 깊은 은혜를 보답하겠습니다. 해가 이미 저물었다.”라 하고 절을 한 다음 눈물을 흘리면서 이별하였다.
대왕(大王)은 스님의 상헌(象軒)을 바라보면서 목송(目送)하고, 호석(虎錫)을 생각하면서 마음이 스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 후로도 임금이 탄 난가(鸞駕)를 스님이 계신 곳에 멈추거나 때로는 어거(御車)를 세우기도하였으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들러서 문안을 올렸다. 뿐만 아니라 계속 안부를 묻는 사신을 보냈고, 자주 슬프고 연모하는 마음을 담은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스님들과 신도가 물결처럼 모여들었고 팔부신장(八部神將)과 호법영지(護法靈祗) 등이 항상 스님을 옹호하였다.
우러러 경심(傾心)의 공경을 이루었으니 어찌 포발(布髮)의 영접을 필요로 하겠는가. 스님의 일행(一行)이 가야산사(迦耶山寺)에 당도하니, 그 절의 스님들이 부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이 선악(仙樂)을 갖추었다. 이 때 번개(幡盖)가 구름처럼 날리고 바라(鉢螺)가 우뢰와 같이 진동하였다. 선교승(禪敎僧) 1,000여 명이 영접하여 절로 들어갔다. 대사(大師)가 문인(門人)과 제자(弟子)들에게 명하기를, “나는 곧 서거(逝去)할 것이니, 석실(石室)을 만들어 거기에 시신을 두되, 적당한 위치를 잡을 것이니 내가 상용하던 의발(衣鉢)은 곽 속에 넣어서 몸을 따르게 하고, 법구(法具)는 문도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였다. 대왕이 이를 듣고 상의(尙醫) 공봉시랑(供奉侍郞)인 직문(直文)에게 명하기를, “특별히 유념하여 선약(仙藥)을 가지고 가서 곁에 있으면서 조석으로 간호하라.”고 하였다. 대사(大師)는 시랑(侍郞)에게 이르기를, “노승(老僧)의 병에는 성약(聖藥)이 없으니, 청컨대 시랑(侍郞)은 곧 상궐(象闕)로 돌아가서 용지(龍?)를 잘 시호(侍護)할 것이지 어찌 노승을 위하여 오랫동안 머물러 있겠는가.”하였으니, 가히 유마거사의 병에는 동군(桐君)의 약을 필요로 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대사(大師)는 항상 마음을 몸의 주인으로 삼았고, 몸으로 마음의 스승을 삼았다. 음식은 여러 가지를 먹지 않았고 옷은 계절에 따라 바꾸어 입지 않았으니, 그의 60년 동안 살아온 자취가 이와 같았다. 태사대왕(太師大王)도 마땅히 우리 스님에게 예배(禮拜)하였으니 어찌 저 부처님께 귀의함과 다르랴. 그러므로 예의가 돈후(敦厚)하고 은총(恩寵)이 숭우(崇優)하였다.
계금법의(?錦法衣)를 보내 드리고 사윤(絲綸)선찰(仙札)로 문의하였다. 공양(供養)하는 시물(施物)을 보내지 않는 달이 없었고, 붓으로 친히 써서 보내는 편지가 끊어지질 않았으니, 저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마등(摩騰)스님을 존경하고 오(吳)나라 손권(孫權)이 강승회(康僧會)스님을 존중한 것을 가히 동년(同年)의 선상(線上)에 놓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개보(開寶) 8년 용집(龍集) 을해(乙亥) 3월 29일 대사께서 곧 열반에 들고자 하여 목욕을 하고나서 대중(大衆)을 모아 놓고 유훈(遺訓)을 내리시기를, “사람은 노소가 있으나 불법에는 선후가 없다. 부처님께서도 구시나가라 사라쌍수(娑羅雙樹)밑에서 입멸(入滅)을 고(告)하셨으니, 만법(萬法)은 마침내 공(空)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는 곧 먼 곳으로 떠나려 하니 너희들은 잘 지내면서 여래(如來)의 정계(正戒)를 잘 보호하고 부지런히 정진하라.”고 말씀하신 후 방으로 들어가서 엄연하게 가부좌를 맺고 당사(當寺) 법당(法堂)에서 입멸(入滅)하였으니, 세수(世壽)는 76세요, 승랍은 61이었다.
이날 새벽 산빛은 성지(聖地)에 무너지고, 달은 법당 앞 향정(香庭)에 떨어졌다. 인령(人靈) 모두 애통해하고 송백(松栢)은 처참하였다. 문하(門下)의 스님들은 모두 위락(萎落)의 탄식을 일으켜 이젠 누구를 의지하랴 하고 슬픔을 머금고 벽용(??)하면서 통곡하니 그 울음소리가 암곡(巖谷)을 진동하였다. 신좌(神座)를 받들어 가야산 서쪽 능선으로 옮겨서 우선 임시로 석호(石戶)를 만들어 봉폐(封閉)하였다. 빛은 금지(金地)를 참담하게 하였고 소리는 옥경(玉京)에까지 들렸다.
광종대왕이 부음(訃音)을 듣고 크게 진도(震悼)하였으니, 각화(覺花)가 앞서 떨어짐을 슬퍼하고 혜월(慧月)이 일찍 빠짐을 개탄하였다. 편지로 조문(弔問)하고 곡물(穀物)로 부의(賻儀)하여 정공(淨供)에 충당하여 현복(玄福)을 넉넉히 지었다. 영정(影幀) 일(一)을 조성하고 이어 국공(國工)으로 하여금 층총(層?)을 세우도록 하고 문인들이 호곡하면서 색신(色身)을 받들어 가야산 서쪽 등에 탑을 세웠으니 이는 상법(像法)을 준수한 것이다. 거기에 법을 전해 받은 큰 제자인 삼중대사(三重大師) 영찬(靈撰)과 일광(一光), 그리고 대사(大師)인 명회(明會)·예림(芮林)·윤경(倫慶)·언현(彦玄)·홍렴(弘廉)과 대덕(大德)인 현오(玄悟)·영원(靈遠)·현광(玄光)·진행(眞幸) 등은 모두 석문의 구경(龜鏡)이며 법원(法苑)의 경종(鯨鍾)으로 지거(智炬)의 여휘(餘輝)를 계승하고, 자헌(慈軒)의 왕철(往轍)을 종습(踵襲)하였다. 스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뼈 속 깊이 사무쳤으며 성화(聖化)에 귀의하여 항상 마음에 잊지 아니하였다. 지금의 임금이 벽(璧)에 당하여 왕위를 계승하였다.
몽령(夢齡)의 나이에 보위에 올라 인풍(仁風)을 드날려 세속(世俗)을 제도하고 불일(佛日)을 도와 삼보(三寶)를 존숭(尊崇)하였다. 왕이 제지(制旨)를 내려 이르기를, “선조(先朝)국사(國師) 고가야산(故迦耶山) 홍법대사(弘道大師)는 鷲嶺의 현언(玄言)을 상고하며 용궁(龍宮)의 오지(奧旨)를 연구하였으며, 이에 불교를 중흥하고 그 빛으로 우리나라를 교화하였으므로 성고(聖考 : 光宗)께서 받들어 국사로 모시되 공경하기를 부처님과 같이 하였다. 현화(玄化)는 널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갔고 자풍(慈風)은 그 빛 또한 온 천하(天下)에 입혔다. 나는 오히려 하늘이 명칙(命勅)하여 스님으로 하여금 돌아가시지 않도록 간여하지 못하였으니, 중생들이 모두 배움의 길이 끊어졌음을 원망하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선지(先志)를 계승하여 휼추(?追)하고, 숭덕(崇德)하는 원인을 나타내고자 멀리서 역명(易名)의 의전(儀典)을 거행하였다. 그리하여 시호를 법인(法印), 탑명(塔銘)을 보승(寶乘)이라 추증하였다.
그 보여줌이 더욱 아름답고 그 전적(傳跡)이 썩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에 스님의 본말행적(本末行蹟)을 담은 비석을 세워 길이 송문(松門)을 빛나게 하려고 허락한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문인(門人)과 제자(弟子)들이 서로 경하해 하면서 멀리 선조 대대로 임금이 불교를 외호(外護)해 준 은혜에 감사하니 애(哀)와 영(榮)이 망극하고, 큰 은혜를 오늘에까지 입으니 총우(寵遇)가 매우 깊도다. 대왕(大王)의 은혜를 받들어 대사(大師)의 행장을 모아 올렸다.
임금이 이 행장(行狀)을 받아 정언(廷彦)에게 하조(下詔)하였으니, “경은 국사수찬관(國史修撰官)이 되어 직접 많은 전적을 보았을 것이니 국사(國師)의 비문(碑文)을 짓도록 하라.”는 사륜(絲綸)이 드디어 나의 손까지 닿았다.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해 돌듯 충성을 다하라. 선왕(先王)께서 고명(顧命)하시어 학사(學士)를 첨가하여 대우(待遇)하였으니, 자네는 마땅히 국사의 비명(碑銘)을 지어 은혜에 보답하도록 하되, 큰 붓을 잡아 행장을 적어서 비석에 새기고 스님의 도덕(道德)을 기록하라.”고 하셨으나, 신(臣)이 사양하니 전하(殿下)께서 다시 신(臣)에게 이르시기를, “자네는 내봉령(內奉令)으로 이 일이 직책과도 관련이 되는 것이니, 제구(?臼)인 명문(明文)을 짓으라는 것은 덕을 갚되 글로 하라는 것이다.”하셨다.
“현(玄)을 탐색하여 무(茂)를 기록하려 하나, 신은 문사(文詞)가 황견(黃絹 : 絶) 유부(幼婦 : 妙)에 부끄럽고, 학문은 객아(客兒)에게 사양하여야 하므로 천근(淺近)한 작은 재주로 현미(玄微)하고 아름다운 스님의 행적(行蹟)을 기록하는 것은 마치 약한 수레에 무거운 짐을 싣고 짧은 두레박 줄로 깊은 우물의 물을 길으려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공연히 못난 여인(女人)이 미인(美人)이 되려고 찡그리는 표정을 흉내내는 것과 같아서 실로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끼쳐줄 능력이 없습니다. 하고자 하는마음은 간절하지만 손에 상처를 입힐까 부끄럽습니다.”고 하였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이제 그만 사양하고 비문을 짓는데 힘써야 하니 물러가서 깊이 생각하라.”하셨다. 대개는 이른바 무(無)에서 유(有)를 창출하고 고요함을 두들겨 소리를 구하니, 돌이 말을 가지고 있으나 산이 빛남을 보지 않으며, 거북은 돌아보지 않으나 석간수(石澗水)가 부끄러워함을 듣는다. 감히 붓을 잡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공연히 도끼 자루를 베는데 부끄럽도다. 오히려 쫓는 듯 가는 듯하여 스스로 그 나아가는 데로 적합하니, 설사 동쪽으로 봉명산(蓬嶋山)이 무너지고 서쪽으로는 개자성(芥子城)이 텅 비어지더라도 묘적(妙蹟)은 그대로 남아 있기를 기대하며, 현공(玄功)은 더욱 오랫동안 전해지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로 인하여 감히 거듭 그 뜻을 펴고자 하여 드디어 명(銘)을 지어 이르노라.
모래 수와 같은 천백억세계(千百億世界)를 보라.
그 속에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이 계신다.
인(仁)을 베푸신 그 공덕 헤아릴 수 없고
팔만 사천 그 법문(法門), 변제(邊際)를 알 수 없다.
진체(眞諦)와 속체(俗諦)를 남김없이 총괄하여
그 광명(光明) 인간(人間)과 천상(天上)에 두루 비추네.
자비로운 그 은혜 백억세(百億界)에 충만하고
삼천시계(三千世界) 중생들 모두 교화하셨네. (其一)
진리가 어찌 먼 곳에 있다 하겠는가.
누구나 진실하면 곧 그 곳에 있는 것
이러한 불법진리 아는 자 누구인가
오직 우리 법인국사 그 스님 뿐 일세.
부처님은 이 도리를 전해 주셨고
뒤를 이어 역대조사(歷代祖師) 상승(相承)하였네.
고요히 인산(仁山)에서 안좌정진(宴坐精進)하고서는
방방곡곡 다니면서 법수(法水)를 뿌렸네. (其二)
일찍부터 심오한 불법 닦고 닦아서
보리(菩提)에서 움 튼 싹 정성껏 길러내어
스님의 도덕은 용수보다 더 높고
넓고 트인 그 지혜 부처님과 통하였네.
사람을 지도하니 도리성혜(桃李成蹊) 이루고
중생을 제도하니 도마죽위(稻麻竹葦)와 같네.
스님께선 왕사(王師)와 국사(國師) 두루 거쳐서
향기로운 그 도덕 국민의 모범이고 (其三)
물 위에 활짝 핀 연꽃처럼 아름답고
뭇 별중에 뛰어난 달처럼 비추었네.
저 많은 사부대중(四部大衆) 정성껏 귀의하니
어찌 진흙에 포발(布髮)함과 다르겠는가.
지혜의 그 광명 온 누리에 비추었고
덕을 덮고 빛을 감춰 장랑하지 않으나
앙모하는 그 신심(信心)은 더 더욱 높았고
비춰주는 그 법등(法燈) 등등(燈燈)이 무진했네. (其四)
자재한 그 법력(法力) 용(龍)과 같이 변화하고
당당한 그 모습은 봉(鳳)과 같이 거룩했다.
때로는 자상한 가르침의 아버지이고
때로는 방황하는 길손의 안내자가 되었다.
손도 천 개 눈도 천 개 두루 갖추신 분
관세음보살처럼 대자대비(大慈大悲)하셔서
스님의 일거일동(一擧一動) 모두가 본받을 것
스님을 생각하면 기쁜 마음 가득했네. (其五)
이제야 비로소 법신(法身)이라 일컬었으니
다만 생사(生死)를 초월하여 상주하실 뿐
슬프다! 양영(兩楹)에 눕는 꿈을 꾸었고
이미 구시라성(拘尸羅城) 쌍수(雙樹)에서 입멸(入滅)했도다.
행적을 새겨둔 비석만 남아 있을 뿐
자비하신 그 모습 언제 다시 만나리.
슬피 우는 눈물은 비오듯 흐르는데
호천통곡(號天痛哭) 불러봐도 붙들 길 전혀 없네. (其六)
태평흥국 3년 용집 섭제(龍集 攝提) 4월 일 세우고 김승렴(金承廉)은 글자를 새기다.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의 협조를 얻어 게재되었다.
출전:『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2】(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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