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상왕산 보원사


법인국사

대한불교조계종 상왕산 보원사

法印國師 坦文, 900 ~ 975
법인국사 탄문


신라 말 고려의 승려로 속성은 고((高), 자는 대오(大悟), 호는 성사미(聖沙彌)이고,
시호는 법인(法印), 탑호는 보승(寶乘)이다.


법인국사 보승탑, 법인국사 보승탑비 (비문-원문, 해석문)

법인국사 보승탑, 법인국사 보승탑
신라 효공왕 4년(900년) 8월 14일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여, 5세에 출가하였다.
어머니가 꿈에서 귀신과 관계하는 중 한 스님이 금빛과자를 주고 갔는데, 그날 임신하여 태어났다고 전한다.

의상대사와 원효대사가 살던 향성산(鄕聖山) 옛 절터에 암자를 짓고, 수년간 수도한 뒤, 장의사(莊義寺, 홍은사 옥천암)의 신엄(信嚴)율사에게서 『화염경(華嚴經)』을 배우고 성사미(聖沙彌)로 불리고, 914년(신덕왕 3년)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이 때 그는 교종을 아우를 수 있는 소양으로 묘각(妙覺)과 율의(律儀)를 갖추었으며, 장의산사에서의 수행이 교선융합사상을 갖게 하는 기본적인 배경이 되었다.
특히 탄문은 화엄경을 사경하여 구룡산사(九龍山寺)에 봉안하는 등 고려 초기에 화엄사상을 진작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후 탄문은 화엄종 승려였으나 교선일치의 교선융합 사상을 가지고 화엄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수용하는 교선일치의 사상을 견지하였다.
화엄종 승려로 정진하던 중 925년 고려 태조의 왕후 유씨가 임신하자 왕명을 받고, 아들을 낳도록 기도를 드려 왕의 신임을 받아 별화상(別和尙)이라 불리었다. 그 아이가 고려 4대 광종이 되었으니 탄문과 고려왕실, 왕권과의 밀접한 관계는 이로써 공고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탄문은 968년 균여를 대신하여 광종으로부터 왕사에 책봉된 이후 귀법사에 머물며 광종의 개혁정치를 후원하였다. 그래서 탄문은 광종의 만수(萬壽)를 위하여 고려철불좌상을 주조하기도 하였으며, 968년부터 975년까지 8년여동안 귀법사에 머물면서 972년에는 태자(太子)를 위하여 천불도량과 오백나한재를 개설하기도 하였다.
탄문이 왕사애 책봉될 때 혜거는 국사에 책봉되었다. 당시 법계로 보면 혜거가 높았지만 광종은 탄문을 석문종주(釋門宗主)라고 하여 혜거보다 더 극진하게 예우하였다. 이것은 당시 탄문과 광종이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러한 밀착 관계로 탄문은 광종의 개혁정책을 후원해 주었으며, 광종은 탄문의 후원으로 적극적인 개혁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광종은 탄문이 보원사로 하산하자 상의공봉 시량 직문을 보내어 탄문을 옆에서 보호하게 할 정도로 극진하게 예우하였다.
당시 보원사는 의상 이후 신라 화엄십찰의 하나로 줄곧 충청도 일대 화엄도량의 중심지로서 교종계 승려들이 상당수 머물고 있었다. 광종은 탄문의 975년 3월 29일 입적하자 보원사에 영정(影幀)을 조성하고, 국공을 파견하여 석조부도를 세우게 한다. 탄문과 광종의 밀착관계는 탄문이 입적한 후 광종이 적극적으로 석조부도와 탑비의 건립에 관여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그런데 광종도 2개월 후 곧바로 사망하고 만다. 이에 경종이 975년 즉위하자마자 탄문의 시호화 탑호를 내리고, 김정언(金廷彦)에게 비문을 찬하도록 한다. 그래서 탑비는 한윤(韓允)이 쓰고, 김승렴(金承廉)이 각자(刻字)하여 978년 4월에 공사가 완료된다. 따라서 탑비의 귀부와 이수는 975년에서 978년 4월 사이에 치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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