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상왕산 보원사


보원사와 수계

대한불교조계종 상왕산 보원사

사원(寺院)은
승려들의 수행과 성스러운 공간으로서 승려는 불교수행의 목표인 삼학(三學 - 계학戒學, 정학定學, 혜학慧學)의 근본이 되는 계를 받음(受戒)으로써 불법을 얻을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는 것으로 불교의 오랜 전통이었다.
이러한 수계의식(受戒儀式)은 엄숙함을 부여하는 장소인 계단(戒壇)에서 이루어졌으며, 신라말에 지장율사에 의해 시작되어 고려말에는 그 체계가 무너졌다.

수계


불교의식은

불교의식은 크게 ① 예경의식(禮敬儀式), ② 공양의식(供養儀式), ③수행의식(修行儀式) ④점안 ? 이운의식(點眼 ? 移運儀式), ⑤ 장례? 천도의식(葬禮?薦度儀式) ⑥ 재의식(齋儀式) ⑦ 법회의식(法會儀式) 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 중 수계의식은 수행의식에 해당된다.

수계는 크게 재가의 계(5계 ? 8계 ? 菩薩戒)와 출가의 계(十戒 ? 具足戒)로 구분된다.
고려에서는 구족계의 수계가 승려로 인정하는 것으로 승과(僧科)의 응시는 구족계를 받아야만(戒牒)승과에 응시할 수 있고 승과에 합격하면 법계(法戒) 및 토지 지급의 경제적 급부가 주어진다. 그러므로 고려사회에서 출가 이후 구족계의 수지(受持)는 필수적인 것으로 계단의 중요성은 신라말에 비하여 더욱 증대되었다.

수계의식은 특정사원의 계단에서 이루어졌으며 계단이 잇는 사원에는 율사(律師)가 존재하였다.


고려전기의 융성했던 등단수계의 체계는 고려말에 이르러 도첩제(度牒制)로 대치되면서 그체계가 무너졌으며, 현재는 통도사의 금강계단(金剛戒壇), 금산사 방등계단(方等戒壇), 용연사의 석조계단, 개성의 불일사지 계단, 백련사계단이 남아있다.

우리나라에 계단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통일신라 643년의 통도사 계단으로 당시에는 ‘계단’으로만 알려져 있었고, 현재와 같은 금강계단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642년 『통도사사적약록(通度寺事蹟略錄) 이후부터이다.

비구(남자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구족계를 받아야 한다, 구족계를 받을 사람은 스무살이 넘어야 하는데 그 미만은 사미로서 출가를허락했다. 이후 모든 자격을 갖추면 구족계를 받아 비구가 된다.

수계는 초기 불교교단에는 없던 제도이다.


최초의 5비구 중 한명인 콘단냐( )에게 부처님이 한 말은 “오라 비구여”였다. 이 말이 곧 구족계였다.이러한 구족계를 치루던 장소가 계단(戒壇)이며, 우리나라에서 계단은 신라말 자장율사에 의하여 통도사에 최초로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계단 창설이 활발했으나 고려시대의 계단이 현존하는 사례가 없다.

보원사에서 수계를 받은 승려


1 신라시대

이엄(利嚴, 866~932) : 신라말 고려초의 고승(高僧)


속성은 김(金), 시호는 진철(眞徹), 탑호는 보월승공(寶月乘空)이고, 계(鷄林:경주)에서 출생하였다.

12세때 가야산 갑사 (伽倻山 岬寺 : 보원사지와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의 덕량(德良)을 따라 출가하였고,886년(정강왕1년) 도견(道堅)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896년(진성여왕 10년) 당나라의 도응(道膺)에게서 선종(禪宗)의 진리를 배우고 911년(효공왕 15년) 귀국하여 김해(金海) 승광산(僧光山)에 절을 짓고 4년동안 선종을 전파하였다.고려 태조에 소명을 받고 개경(開京)에 들어가 우대를 받다가 932년 태조가 해주(海州) 수미산(須彌山)에 창건한 광조사(廣照寺) 주지가 되어 선풍(禪風)을 선양, 가지산(迦智山) 보림사(寶林寺)를 비롯한 구산선문(九山禪門)이 완성되었다.
광조사(廣照寺)에는 937년(태조 20년)에 최언위가 세운 비 해주 광조사진철대사보월승공탑비(海州 廣照寺眞徹大師寶月乘空塔碑)가 있다.

현훈(玄暈)


중원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中原 淨土寺法鏡大師慈燈塔碑)에 의하면,

보원사가 아닌 가야산사(伽倻山寺)로 기록되어 있고, 건녕(乾寧)5년(원래 중국연호로는 광화1년, 898년)에 수계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가야산사는 지금의 보원사지와 관련있는 것으로 보인다.

체징(體澄 804~880)


속성은 김(金)이요, 시호는 보조(普照), 탑호는 창성(彰聖), 웅진(熊津:공주)출생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화산 권법사(花山 勸法師)에게서 배웠다.827년(흥덕왕 2년) 가량협산 보원사(加良峽山 普願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의 염거(廉居) 밑에서 선(禪)을 닦았다. 937년(희강왕 2년)정육(貞育) ? 허회(虛會) 등과 당나라에 가서 수도하고 840년(문성왕 2년)귀국, 무주(武州 :光州) 황학난야(黃壑蘭若)에 있었다.
그 후 헌안왕의 초청으로 경주(慶州)에 갔다가 가지산(迦智山) 보림사(寶林寺)를 중수하고 선종(禪宗)을 폈다.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보물 제157호)과 김영(金潁)이 세운 탑비 장흥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長興 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 : 보물제158호)가 전라남도 장흥군 보림사 터에 남아 있다.
이 탑비에 가량협산보원사에서 대화정미(중국연호는 원래 太和丁未, 827년 흥덕왕 2년)에 수계를 받은 것으로 나옴. 입단장(入壇場)이라는 문구를 통해서 계단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2 고려시대

윤다(允多, 864~945) 고려초기의 승려

자는 법신(法信)이요, 시호는 광자대사(廣慈大師),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제3조로서 동리산에서 동리산파의 개산조(開山祖) 혜철(惠哲)로부터 선(禪)을 배운 뒤 가야갑사(伽倻岬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동리산으로 돌아와 선을 수행하였다.

묘지(妙旨)를 터득하고 현묘한 이치를 통달하였다. 이 때부터 선문(禪門)이 크게 융성하였는데, 고려 태조는 사신을 보내 대궐로 초청하였다. 그는 태조에게 국가와 백성의 행복이 무엇인가를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고 아뢰었다. 태조가 흥왕사(興王寺) 황주원(黃州院)에 머무르게 하였으나, 동리산으로 되돌아왔다. 그의 법맥은 지장(智藏)-혜철(惠哲)-여선사(如禪師)로 이어졌다.
그의 부도(浮屠) 대안사광자대사탑(谷城 大安寺廣慈大師碑 : 보물 274년)은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의 대안사에 있다.

진공대사(眞空大師)

진공대사는 855년(신라 문성왕 17년)에 출생하여 937년(고려 태조 20년)에 입적하였으며, 진공대사(855~937)의 속성은 김씨, 신라의 왕계(王系) 확종(確宗)의 아들이다.

가야산(伽倻山)에 입산하여 선융(善融)에게서 승적을 얻었다.
874년(경문왕 14년) 가야산 수도원에서 구족계를 받고 삼장(三藏)을 연구하였다. 그가 입적한 지 2년째 되는 해인 939년 고려 태조가 그에게 진공(眞空)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탑을 건립하도록 하였다. 탑호(塔號)를 보법(普法)이라 하고 그 옆에 탑비를 세웠다. 비신(碑身)은 바다 속의 바위를 캐내서 만들었다고 한다. 비문은 최언휘가 지었고, 이환주가 글을 쓰고 전액(篆額)하였다.

대지국사(大智國師)

대지국사는 현화사(玄化寺)를 중심으로 한 고려 법상종 승려들 중 한사람으로 현화사에서 활동한 승려들의 기록을 간추려보면,

먼저 현화사의 제1대 주지였던 대지국사 법경(法鏡, 고려초)에 관한 기록은 원래 삼각산(三角山)의 삼천사(三川寺)에 있던 그의 탑비(塔碑)에서 이를 알 수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이 탑은 삼천사가 폐사되면서 일찍이 파손되어 그 전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대지국사의 수계기록은 “高陽 三川寺大智國師碑”에서 알 수 있다. 비가 많이 훼손되어 글자가 많이 부족하다. 다만, 수어가야(受於伽倻)라는 문구를 통해서 보원사에서 수계를 받았다는 추정은 가능하다.

출처 : 장헌덕(한국전통문화학교 전통건축하과 교수)님의 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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