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미소기도(2020-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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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0-07-31 10:37 조회3,053회 댓글0건본문
수륙재 연원 - 태조 이성계와 수륙재(2)
조선시대 수륙재가 처음 개설된 것은 1395년(태조4) 10월이었다. 태조는 건국한지 3년만인 이 해 2월 수륙재를 설행할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수륙재를 관음굴, 견암사, 삼화사에 베풀고 매년 봄과 가을에 항상 거행하게 하였다. 고려의 왕씨를 위한 것이었다(태조실록 4년 2월24일)
태조는 신왕조의 개창 이후 민심을 수습하고, 화합을 이루기 위하여 유화정책을 펼쳤다. 고려왕조의 관원을 그대로 수용하여 재배치하고, 논공행상을 광범위하게 행하면서 전왕조의 세족들에게도 은덕을 베풀었다. 그러나 신왕조의 개창에 반대한 고려 신하들에 대해서는 개국 즉시 처벌을 단행하였다. 즉 즉위한지 11일 만에 우현보·이색 등 56인의 고려관료들을 유배 보냈다. 개국 초기 국가기강을 수립하기 위한 당연한 조치였지만, 얼마 후 태조는 이들을 모두 사면하고 관직에 재등용시켜 주었다. 이와 같은 조치는 태조의 너그러운 온화한 성품을 그대로 반영한다. 고려신하에 대한 처분과 마찬가지로 고려 왕족에 대한 처분도 처음에는 관대하게 이뤄졌다. 즉 태조는 즉위년에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공양군을 강원도 간성에 유배 보내고, 고려 왕족들을 도서지방과 먼 지방으로 안치, 생활을 보장해 주었다.
1393년(태조 2)에는 섬에 안치하였던 왕족들을 육지에 나와 살게 하고. 재질이 있는 사람은 관직에 임용하는 등의 후의를 베풀었다, 왕조가 교체된 후 1년이 넘었지만, 구체제의 반발이나 조직적 저항의 움직임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후 왕족들을 몰살하게 되는 비극적 사건이 발생하였다. 즉 태조 3년 동래 현령 김가행과 염장관 박중질 등이 왕씨들의 명운을 점치는 일이 발생하자, 대간과 형조에서는 고려 왕족들을 위험세력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모두 먼 지방으로 유배시킬 것을 상소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이 사건은 단순히 왕씨의 명운을 점쳐 본 것 뿐이라며 처벌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여전히 유화적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대간 등의 세력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고려 왕족과 구세력들이 왕씨 복립운동을 일으킬 것이라며 거듭 이들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대간과 형조 등의 신하들은 이 사건의 발단을 일으켰던 김가행과 박중질을 국문한 결과, 고려왕실의 복립운동이라는 자백을 강제로 얻어냈다, 이에 따라 김가행 등은 모두 주살하였고, 공양왕과 그 아들들은 감성에서 삼척으로 유배시켰다. 이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394년(태조 3) 4월에는 공양왕을 비롯한 전 왕씨들의 참형을 주장하는 상소를 빗발같이 울렸다. 태조는 더 이상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도평의사사로 하여금 신하들의 여론을 물어 최종 결정하라고 하교하였다. 그 결과 멀리 섬으로 유배하자는 온건 여론이 일부 있었지만, 결론은 참형이엇다. 마침내 태조는 참형의 여론을 따른다고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공양왕과 두 아들은 삼척에서 교살하였고, 나머지 왕족들은 각각 유배되어 있던 강화도와 거제도 등에서 모두 바다에 수장시켰다.
태조는 처음부터 이러한 피의 숙청을 원치 않았다, 신왕조의 국가 기틀을 화합과 단결의 기조에서 이룩하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쳤고, 결국 그들의 힘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삼척에 있던 공양왕에게 참형을 내리면서 신하를 보내 죽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입장을 알아달라는 듯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정남진 등이 삼척에 이르러 공양군에게 교지를 전하였다. “신민이 추대하여 나를 임금으로 삼았으니 실로 하늘의 운수요. 군(공양왕)을 관동에 가서 있게 하고, 그 나머지 동성(고려의 왕족 왕씨)들도 각기 편리한 곳에 가서 생업을 보안하게 하였는데, 지금 동래 현령 김가행과 염장관 박중질 등이 반역을 도모하고자 하여 군과 친속의 명운을 장임 이흥무에게 점쳤다가, 일이 발각되어 복죄하였는데, 군은 비록 알지 못하지만, 일이 이 같은 지경에 이르러, 대간과 법관이 장소에 연명하여 청하기를 12번이나 하였으되, 여러 날 동안 굳이 다투고, 대소 신료들이 또 글을 올려 간하므로, 내가 마지못하여 억지로 그 청을 따르게 되니, 군은 이 사실을 잘 아시오(태조실록, 태조3년4월17일)
이러한 건국초의 정치적 상황이 조선시대 태조의 수륙재 설행의 직접적 배경이 되었다. 태조는 고려왕족들을 자신의 명으로 몰살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자책감과 미안함을 해소하는 방안으로 수륙재를 생각해냈다. 이에 따라 왕족을 멸한지 10개월 만인 이듬해 2월 관음국과 견암사, 그리고 삼화사에 수륙재를 개설, 매년 봄과 가을 항상 거행하게 하였다.(한상길, “조선시대 수륙재 설행의 사회적 의미”에서 발췌)
아래 영상은 두달 전에 찍은 건데 엊그제 6시 내고향에 나온 보원사 복원추진위원장 스님의 모습입니다. 가수 신성이 예산 신례원 출신이고 트롯 가수 동생 세명과 농촌 돕기 특별프로그램으로 찍었답니다. 마지막 날 예산 출렁다리보고 수덕사에 방문하여 안내 해 주는 장면 입니다. ^^
갑자기 쏟아 지는 비가 소리도 요란하고 엄청 납니다. 조심들 하시구요.
조선시대 수륙재가 처음 개설된 것은 1395년(태조4) 10월이었다. 태조는 건국한지 3년만인 이 해 2월 수륙재를 설행할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수륙재를 관음굴, 견암사, 삼화사에 베풀고 매년 봄과 가을에 항상 거행하게 하였다. 고려의 왕씨를 위한 것이었다(태조실록 4년 2월24일)
태조는 신왕조의 개창 이후 민심을 수습하고, 화합을 이루기 위하여 유화정책을 펼쳤다. 고려왕조의 관원을 그대로 수용하여 재배치하고, 논공행상을 광범위하게 행하면서 전왕조의 세족들에게도 은덕을 베풀었다. 그러나 신왕조의 개창에 반대한 고려 신하들에 대해서는 개국 즉시 처벌을 단행하였다. 즉 즉위한지 11일 만에 우현보·이색 등 56인의 고려관료들을 유배 보냈다. 개국 초기 국가기강을 수립하기 위한 당연한 조치였지만, 얼마 후 태조는 이들을 모두 사면하고 관직에 재등용시켜 주었다. 이와 같은 조치는 태조의 너그러운 온화한 성품을 그대로 반영한다. 고려신하에 대한 처분과 마찬가지로 고려 왕족에 대한 처분도 처음에는 관대하게 이뤄졌다. 즉 태조는 즉위년에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공양군을 강원도 간성에 유배 보내고, 고려 왕족들을 도서지방과 먼 지방으로 안치, 생활을 보장해 주었다.
1393년(태조 2)에는 섬에 안치하였던 왕족들을 육지에 나와 살게 하고. 재질이 있는 사람은 관직에 임용하는 등의 후의를 베풀었다, 왕조가 교체된 후 1년이 넘었지만, 구체제의 반발이나 조직적 저항의 움직임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후 왕족들을 몰살하게 되는 비극적 사건이 발생하였다. 즉 태조 3년 동래 현령 김가행과 염장관 박중질 등이 왕씨들의 명운을 점치는 일이 발생하자, 대간과 형조에서는 고려 왕족들을 위험세력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모두 먼 지방으로 유배시킬 것을 상소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이 사건은 단순히 왕씨의 명운을 점쳐 본 것 뿐이라며 처벌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여전히 유화적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대간 등의 세력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고려 왕족과 구세력들이 왕씨 복립운동을 일으킬 것이라며 거듭 이들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대간과 형조 등의 신하들은 이 사건의 발단을 일으켰던 김가행과 박중질을 국문한 결과, 고려왕실의 복립운동이라는 자백을 강제로 얻어냈다, 이에 따라 김가행 등은 모두 주살하였고, 공양왕과 그 아들들은 감성에서 삼척으로 유배시켰다. 이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394년(태조 3) 4월에는 공양왕을 비롯한 전 왕씨들의 참형을 주장하는 상소를 빗발같이 울렸다. 태조는 더 이상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도평의사사로 하여금 신하들의 여론을 물어 최종 결정하라고 하교하였다. 그 결과 멀리 섬으로 유배하자는 온건 여론이 일부 있었지만, 결론은 참형이엇다. 마침내 태조는 참형의 여론을 따른다고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공양왕과 두 아들은 삼척에서 교살하였고, 나머지 왕족들은 각각 유배되어 있던 강화도와 거제도 등에서 모두 바다에 수장시켰다.
태조는 처음부터 이러한 피의 숙청을 원치 않았다, 신왕조의 국가 기틀을 화합과 단결의 기조에서 이룩하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쳤고, 결국 그들의 힘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삼척에 있던 공양왕에게 참형을 내리면서 신하를 보내 죽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입장을 알아달라는 듯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정남진 등이 삼척에 이르러 공양군에게 교지를 전하였다. “신민이 추대하여 나를 임금으로 삼았으니 실로 하늘의 운수요. 군(공양왕)을 관동에 가서 있게 하고, 그 나머지 동성(고려의 왕족 왕씨)들도 각기 편리한 곳에 가서 생업을 보안하게 하였는데, 지금 동래 현령 김가행과 염장관 박중질 등이 반역을 도모하고자 하여 군과 친속의 명운을 장임 이흥무에게 점쳤다가, 일이 발각되어 복죄하였는데, 군은 비록 알지 못하지만, 일이 이 같은 지경에 이르러, 대간과 법관이 장소에 연명하여 청하기를 12번이나 하였으되, 여러 날 동안 굳이 다투고, 대소 신료들이 또 글을 올려 간하므로, 내가 마지못하여 억지로 그 청을 따르게 되니, 군은 이 사실을 잘 아시오(태조실록, 태조3년4월17일)
이러한 건국초의 정치적 상황이 조선시대 태조의 수륙재 설행의 직접적 배경이 되었다. 태조는 고려왕족들을 자신의 명으로 몰살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자책감과 미안함을 해소하는 방안으로 수륙재를 생각해냈다. 이에 따라 왕족을 멸한지 10개월 만인 이듬해 2월 관음국과 견암사, 그리고 삼화사에 수륙재를 개설, 매년 봄과 가을 항상 거행하게 하였다.(한상길, “조선시대 수륙재 설행의 사회적 의미”에서 발췌)
아래 영상은 두달 전에 찍은 건데 엊그제 6시 내고향에 나온 보원사 복원추진위원장 스님의 모습입니다. 가수 신성이 예산 신례원 출신이고 트롯 가수 동생 세명과 농촌 돕기 특별프로그램으로 찍었답니다. 마지막 날 예산 출렁다리보고 수덕사에 방문하여 안내 해 주는 장면 입니다. ^^
갑자기 쏟아 지는 비가 소리도 요란하고 엄청 납니다. 조심들 하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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