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미소기도(2020-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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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0-10-28 08:04 조회2,346회 댓글0건본문
철거와 뒷마무리가 끝나고 한적한 모습의 보원사로 돌아왔습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준비 과정에는 등만 대면 기절해서 그런지 꿈도 안꿨는데 끝났는데 날마다 준비하는 꿈을 꾸고 있으니 희유한 일입니다.^^
오랜 인연 서재영 박사의 글을 공유 합니다.
*시비 거는 이에게 설법하지 말라 ***
작심하고 시비 거는 이에겐
어떤 설법이라도 ‘무용지물’
소모적 논쟁 일삼는 자에겐 차라리 ‘침묵’이 적절한 설법
부처님께서 코살라국을 유행하시다 기수급고독원으로
돌아오셨을 때의 일이다.
당시 반려(返淚)라는 바라문이 있었는데 평소 부처님 설법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부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반론을 펴기 위해
정사로 찾아왔다.
그 때 부처님은 수많은 대중에게 둘러싸여 설법하고 계셨다.
하지만 바라문이 오는 걸 보시더니 갑자기 설법을 멈추고
침묵을 지키셨다.
설법을 듣고 꼬투리를 잡아 공격할 작정이었던 바라문은
당황해 왜 설법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부처님은 만약 허물과 단점을 찾기 위해 설법을 듣고자 한다면
어떤 법을 설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사람에게는
설법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이 외도들에게 설법하지 않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설사 외도라고 할지라도 다투려는 생각과 불신에서 벗어나
번뇌와 질투심을 버리고 법을 따르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다면
마땅히 설법하겠다고 하셨다.
바라문은 부처님이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물러갔다.
별역잡아함 제4권에 실려 있는 이 내용은 부처님 당시에도
종교적 문제로 시비 거는 외도들이 많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논쟁을 위해 이교도가 찾아왔다면 무모한
논쟁을 일삼는 것보다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적절한 대응임을
보여주셨다.
〈유마경〉은 보살이 설법할 때는 마치 사자가 포효하듯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하라고 했다.
설법자가 확신을 갖고 설해야 청법자에게 믿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비를 따지고 트집 잡는 사람이 있다면 설법이 제대로
될 리 없다.
어떻게 해야 비난과 시비를 피해갈까라는 생각 때문에 설법은
왜곡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적 신념이 달라 시비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이라면 일방적인 주장을 펴는 것보다 침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부처님은 제자들을 향해 설법을 할 때는 두 가지 사항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셨다.
첫째는 반드시 법의 요체를 분명하고 조리 있게 설하는 것이며,
둘째는 설할 것이 없으면 차라리 침묵하는 일이 있더라도
잡다한 세속 일을 논하지 말라는 것이다.
설법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도 문제지만 상황에 따라 침묵이
진정한 설법이 될 때도 있다.
이교도와 소모적 논쟁을 일삼는 것도 잡다한 세속사를 논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물론 현대사회는 다종교사회이기 때문에 종교 간의 활발한
대화와 소통이 필요하다.
그러나 신념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종교인들에게 무조건
믿음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이 모이는 장소라면 어디서나
하나님 믿고 천국 갈 것을 강요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종교는 그렇게 일방적으로 강요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종교적 믿음은 말하는 자와 듣는 자 간에 믿음과 이해라는
상호관계 속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을 닫고 있다면 아무리 좋은 법을 설해도
감동은 커녕 시비와 논쟁거리가 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좋은 설법은 설법 자체도 훌륭해야 하겠지만
듣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서도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다.
보조국사가 ‘법을 들을 때는 마치 얇은 얼음을 밟는 것과 같이
신중한 자세로 귀와 눈을 기울여 현묘한 말씀을 들어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불교는 설법을 원치 않는 사람에게 법을 강요하지 않는다.
설법하기 전에 반드시 청법가를 하도록 한 이유도 여기에
기인한다.
따라서 소중한 가르침에 대해 마음을 열고 겸허히 듣겠다는
자기 다짐은 법을 듣는 것보다 우선하는 절차다.
불교의 이 같은 특성은 때로는 전법에 소극적인 태도를 갖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다종교사회에서는 이 같은 태도야말로 서로를 존중하는
공존의 덕목이 된다.
어떤 의미에서 종교적으로 논쟁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설법하지
말라는 것은 믿음이 서로 다른 사람끼리 종교적 교리를 놓고
다투지 말라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준비 과정에는 등만 대면 기절해서 그런지 꿈도 안꿨는데 끝났는데 날마다 준비하는 꿈을 꾸고 있으니 희유한 일입니다.^^
오랜 인연 서재영 박사의 글을 공유 합니다.
*시비 거는 이에게 설법하지 말라 ***
작심하고 시비 거는 이에겐
어떤 설법이라도 ‘무용지물’
소모적 논쟁 일삼는 자에겐 차라리 ‘침묵’이 적절한 설법
부처님께서 코살라국을 유행하시다 기수급고독원으로
돌아오셨을 때의 일이다.
당시 반려(返淚)라는 바라문이 있었는데 평소 부처님 설법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부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반론을 펴기 위해
정사로 찾아왔다.
그 때 부처님은 수많은 대중에게 둘러싸여 설법하고 계셨다.
하지만 바라문이 오는 걸 보시더니 갑자기 설법을 멈추고
침묵을 지키셨다.
설법을 듣고 꼬투리를 잡아 공격할 작정이었던 바라문은
당황해 왜 설법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부처님은 만약 허물과 단점을 찾기 위해 설법을 듣고자 한다면
어떤 법을 설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사람에게는
설법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이 외도들에게 설법하지 않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설사 외도라고 할지라도 다투려는 생각과 불신에서 벗어나
번뇌와 질투심을 버리고 법을 따르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다면
마땅히 설법하겠다고 하셨다.
바라문은 부처님이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물러갔다.
별역잡아함 제4권에 실려 있는 이 내용은 부처님 당시에도
종교적 문제로 시비 거는 외도들이 많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논쟁을 위해 이교도가 찾아왔다면 무모한
논쟁을 일삼는 것보다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적절한 대응임을
보여주셨다.
〈유마경〉은 보살이 설법할 때는 마치 사자가 포효하듯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하라고 했다.
설법자가 확신을 갖고 설해야 청법자에게 믿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비를 따지고 트집 잡는 사람이 있다면 설법이 제대로
될 리 없다.
어떻게 해야 비난과 시비를 피해갈까라는 생각 때문에 설법은
왜곡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적 신념이 달라 시비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이라면 일방적인 주장을 펴는 것보다 침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부처님은 제자들을 향해 설법을 할 때는 두 가지 사항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셨다.
첫째는 반드시 법의 요체를 분명하고 조리 있게 설하는 것이며,
둘째는 설할 것이 없으면 차라리 침묵하는 일이 있더라도
잡다한 세속 일을 논하지 말라는 것이다.
설법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도 문제지만 상황에 따라 침묵이
진정한 설법이 될 때도 있다.
이교도와 소모적 논쟁을 일삼는 것도 잡다한 세속사를 논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물론 현대사회는 다종교사회이기 때문에 종교 간의 활발한
대화와 소통이 필요하다.
그러나 신념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종교인들에게 무조건
믿음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이 모이는 장소라면 어디서나
하나님 믿고 천국 갈 것을 강요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종교는 그렇게 일방적으로 강요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종교적 믿음은 말하는 자와 듣는 자 간에 믿음과 이해라는
상호관계 속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을 닫고 있다면 아무리 좋은 법을 설해도
감동은 커녕 시비와 논쟁거리가 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좋은 설법은 설법 자체도 훌륭해야 하겠지만
듣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서도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다.
보조국사가 ‘법을 들을 때는 마치 얇은 얼음을 밟는 것과 같이
신중한 자세로 귀와 눈을 기울여 현묘한 말씀을 들어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불교는 설법을 원치 않는 사람에게 법을 강요하지 않는다.
설법하기 전에 반드시 청법가를 하도록 한 이유도 여기에
기인한다.
따라서 소중한 가르침에 대해 마음을 열고 겸허히 듣겠다는
자기 다짐은 법을 듣는 것보다 우선하는 절차다.
불교의 이 같은 특성은 때로는 전법에 소극적인 태도를 갖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다종교사회에서는 이 같은 태도야말로 서로를 존중하는
공존의 덕목이 된다.
어떤 의미에서 종교적으로 논쟁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설법하지
말라는 것은 믿음이 서로 다른 사람끼리 종교적 교리를 놓고
다투지 말라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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