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사지에 가서 나의 죄를 고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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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1 작성일06-09-18 16:13 조회6,316회 댓글0건본문
[龍膽 칼럼] 장 용 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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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겅퀴야. 엉겅퀴야. 도대체 내가 소멸해야 할 업장의 재고량이 얼마나 남은 것이냐? 오늘이냐? 내일이냐? 아직도 성글지 못한 이 번뇌의 꼬투리들을 과연 제대로 여물게 할 시간이 있겠는가? 또 그것을 달려드는 멥새들에게 한 줌 먹이로 던져 줄 기회가 있겠는가? 폐사지를 들락거리다 보니 보인다. 먼 아승기겁(阿僧祇劫)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가 몸과 입과 뜻으로 지어 모은 죄, 수미산보다도 크다. 송충이, 쐐기, 무당벌레들도 징그러운 얼굴, 독침 박힌 몸뚱이들 그대로 드러내고 사는데, 만물의 영장인 나는 치사량의 오욕칠정을 포장한 채, 직립보행도 답답하여 바퀴를 굴리며 조급증을 낸다. 엉겅퀴야. 나 이렇게 속도 조절을 안해도 되는 것이냐?
엉겅퀴야. 엉겅퀴야. 너는 가시 이파를 달고도 얼굴 가득 꽃물이 번지는데, 나는 이렇게 안경 도수를 높이면서도 다초점 시력을 가져도 되는 것이냐? 폐사지의 문지방을 넘나들다보면 나도 아예 이 텅 빈 충만의 현장으로 거주지를 옮기고 싶어진다. 풀씨처럼 가볍게 날아올라 햇살의 부축을 받으며, 쑥부쟁이, 씀바귀 사이에 슬며시 세 들고 싶다. 폐사지는 그런 곳이다. 향을 쌌던 종이에서 향냄새가 나듯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에서도 향냄새가 난다. 부처님 계시던 곳은 속속들이 그 향물이 배어 이끼 낀 것이든 흙 묻은 것이든 그 어느 것도 오래도록 향 내음이 난다. 어디나 연꽃방죽인 폐사지. 비록 연화대가 깨지고 일그러졌어도 부챗살 같은 연잎 그림자가 사방에서 너울댄다. 법신은 언제나 천백억 화신으로 오시는 것이어서 팔만사천 호법 성중(聖衆)들은 눈 부릅뜨고 기다리는 것이다. 때 되면 들짐승, 산짐승 들이 모여 안거를 하고, 풀벌레, 날벌레도 모여 사경을 하거나 다라니를 외운다. 들꽃들도 철따라 옷을 바꿔 가며 색즉시공을 연출한다. 야단법석들이다. 한번 부처님을 모셨던 자리는 차마 야차, 나찰들이 범접할 수 없는 것이어서 칡넝쿨도 고개를 돌리고 물소리도 에돌아 흐른다. 무너진 금당의 문고리를 당기면 관세음보살의 현신인냥 참나리 몇 대 후불탱화로 서 있고, 마른 풀섶을 헤치면 까만 풀씨들이 사리알처럼 뒹군다. 폐사지에 가면 머무는 시간만큼 물아일여(物我一如)가 되고, 사유의 쟁기질을 하는 만큼 천지동근(天地同根)의 한 뿌리를 캔다. 잃은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 무욕의 대지인 폐사지. 열반적정이 살아서 숨 쉬는 곳. 영원한 불국토인 그곳에서 번뇌의 보따리를 풀고자 수선을 떠는 것도 죄악이다. 해탈은 부처의 것이고, 번뇌는 중생의 것일 뿐, 아무리 참회의 이름으로 업장의 찌꺼기를 씻어내려 하나, 발톱에 이끼 낀 돌거북은 두 눈을 씀벅일 뿐이다.
폐사지는 침향(沈香)이다. 비바람불고 파도치던 역사의 진펄에 천년을 묻어둔 침향이다. 두드리면 쇳소리가 난다. 태우면 실파와 생강 타는 냄새가 나고, 쪼개면 아득한 세월의 지층이 물무늬로 아른댄다. 폐사지는 꼭꼭 뭉쳐 둔 민초들의 원력이다. 오늘도 윤회를 거듭하는 폐사지. 어느 때는 묵정밭이었다가, 과수원이 되어 주저리주저리 법열이 영글기도 하고, 부지런한 권속들을 만나 오색단청으로 일어서기도 한다. 그러나 허명을 일으켜 세우려고 폐사지를 일으켜 세우는 수고는 부질없는 욕망일 뿐이다. 보라. 찾는 이가 없어도 문비를 활짝 열어 놓는 혜목산 고달사지 부도탑, 목계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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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년 09월 18일 09:37:36 / 수정 : 2006년 09월 18일 09:45: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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