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사와 문수사 길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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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2-03-20 18:42 조회6,144회 댓글0건본문
내포 가야산이 불교문화의 특구라는 것은 수많은 절이 있었던 것에서 연유합니다.
첫째 동서남북에 큰 절이 있었습니다.
동쪽에는 서림사, 서쪽에는 개심사, 남쪽에는 가야사, 북쪽에는 보원사가 있었습니다.
현재 개심사만 남아있고,
서림사를 비롯해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묘가 되어버린 가야사,
통일신라시대 화엄십찰의 하나로 대찰이었던 보원사는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습니다.
둘째 보원사 주변에 100여개의 절터
가야사 주변에 100여개의 절터가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가야산에는 문수사와 보현사가 있었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협시보살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있듯이
가야산 줄기 상왕산을 중앙에 두고 오른쪽은 문수사, 왼쪽엔 보현사가 있었습니다.
현재 문사사는 남아 있지만, 보현사는 터만 남아 있습니다.
보현사가 있었다는 기록은 그 아래 마을이름이 보현동이라는 사실과 함께
조선시대 예헌 이철환이 1753년 충청도 가야산 일대를 4개월여 동안 유람하고 남긴 유기인 <상산삼매(象山三昧)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한 삼존불의 형태로
절이 세워졌다는 것 자체만해도 한반도에서 유일한 형상이니
이 곳 가야산이 얼마나 불교적 영토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문수사와 보현사 터를 찾아 길을 걸어 보기로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걸으면서 옛 선조들의 불심을 느낄 수 있도록
그 길을 알려주고 싶어서였습니다.
그 오랜 세월 걸었지만,
또 오랜 세월 잊혀진 길이었기에
한번에 찾을 수 없으리라 생각하면서도
오솔길이라도 남아있기를 희망하면서
2012년 3월 20일 그 첫발을 디뎠습니다.
수덕사 능해스님과 푸른예산21의 김영우국장님, 내포문화숲길 김종대국장님과 함께,
보원사에서 아침 9시에 길을 나섰습니다.
1960년대 70년대 마을 이장을 하셨던 마을 할아버지에게 길을 묻는 것에서 시작했습니다.
20년 전까지는 동네 분들이 걸어다녔던 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도로를 이용해서 차로 이동하니 그 산길이 없어졌습니다.
지도상으로는 산 넘으면 바로 보현동이지만, 길이 없는 원시림이 되어 있었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서 새싹이 돋기라도 하면 정글이 되어 버리는 숲에서 길을 찾는 것은 더욱 어렵기 때문에 지금이 모르는 산 길을 찾기가 가장 적당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산 속을 헤매었습니다.
30여분 헤매다 길 위에서 만난 절터입니다.
가는 곳 마다 보이는 곳이 절터입니다.
그러니 가야산이 절골이란 것을 실감하는 현장입니다.
그 터에서 만난 아그배나무입니다.
쉽게 만날 수 없는 배나무라고 합니다.
그 터를 뒤로 하고 산림을 가꾸는 길로 이용하는 듯한 길을 만났습니다.
한참을 길 없는 산 속을 헤집고 오르다가 임도를 만난 것입니다.
임도를 따라 능선을 오르니 바로 눈앞에 나타나는 초지입니다.
소를 키우는 목장입니다.
현대 정주영회장이 북한에 몰고 갔던 소도 이 곳에서 키운 소였습니다.
구제역 등을 생각해서 외인의 출입을 막는 문이 있었습니다.
문 밑을 기어서 초지로 나아갔더니 갑자기 눈앞에 시원한 전경이 나타났습니다.
길에서 만난 노간주입니다.
예전에 집에서 소를 기를 때 쇠코뚜레를 만들던 나무라고 합니다.
그렇게 길을 가다가 상왕산으로 오르는 길이란 푯말이 있는 곳 못미처에서
왼쪽으로 난 길로 내려서 보현사터를 찾아 걸었습니다.
30여분이상을 길 없는 길로 다시 하산을 하다가 대나무 밭을 발견했습니다.
절터를 찾으려면 대나무가 있는 곳을 찾으라고 옛 어른 스님들이 말씀하셨다는
능해스님의 설명을 들으며 대나무 숲을 헤쳐 들어갔습니다.
김영우국장은 지금도 대나무가 우거져 어려운 길을
여름에 와서 찾으려했으니 얼마나 어려웠겠냐고 합니다.
처음 절터라는 흔적을 발견한 것은 역시 기와였습니다.
와편도 아니고 온전한 기와가 고스란히 흙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1754년 상산삼매에 보현사가 건재했으니,
이 기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시간이란게 200년 안팎일 것입니다.
절터가 있었다고 확실하게 말해주는 것은 탑 부재입니다.
상당한 규모의 탑이었던 것 같습니다.
탑부재 위에 상산삼매의 보현사 편을 펼쳐 놓았습니다.
옛 글을 읽을 줄 모르는 까막눈이라 답답할 따름입니다.
대 숲에 앉아 있으니 참 따뜻했습니다.
바람도 별로 없고 따뜻하니 이렇게 대나무들이 잘 자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옛 절터를 많이 찾은 김영우국장의 말에 의하면,
절터에 가보면 공통된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그 곳에 가보면 어김없이 좌 우에 앞산이 에워싸고 있고,
절터에서 바라보면 시야가 확 트인 곳이더라"라고 합니다.
보현사 터에서 앞을 바라보니까 김영우국장의 설명이 그럴싸했습니다.
앞산이 좌 우로 에워싸고
시야가 확 트진 곳에 보현사는 위치했었습니다.
대나무가 참 맣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절터를 뒤로 하고 문수사를 찾아서 길을 나섰습니다.
대나무 숲을 나오니 바로 공기가 차가움을 느끼게 됩니다.
절터의 위치가 얼마나 따뜻한 곳이었던지 .....
길에서 만난 나무의 썩은 밑둥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나이테 사이에 검은색 나이테도 있어서 뭔지 모르지만 신기했어요
`
가야산은 평야보다 온도가 4~5도가 낮은 듯합니다.
그래도 생강나무가 봄을 가장 먼저 알리려고 합니다.
꽃망울을 터뜨리려고 잔뜩 준비하고 있습니다.
보현사터에서 30분 남짓 내려오니 초지 경계 선에서 보현동 경계석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경계석을 사이에 두고 초지를 가로질러 문수사로 내려왔습니다.
문수사에는 참 아름다운 극락보전이 있습니다.
세 분의 부처님을 미롯해 닷집도, 천정의 단청도,
무엇보다 부처님 앞의 극락조가 있는 독특한 법당입니다.
그리고 불단 우측에 나한님들이 계십니다.
아름답고 친근하고 천진스런 나한님들을 친견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문수사 극락보전 참배를 끝내고 나니 12시가 되었습니다.
산행을 고작 3시간 했는데,
길 없는 길을 해매여서인지 엄청 오랫동안 걸었던 기분입니다.
사람들과 함께 걷기에는 무리인 길이라
몇 번을 더 걸어야 여러 사람들이 함께 갈 수 있는 길을 만나게 될지....
그렇지만 보현사와 문수사를 잇는 길을 간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감동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포기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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