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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사지에 가서 나의 죄를 고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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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1 작성일06-09-18 16:13 조회6,3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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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膽 칼럼] 장 용 철


엉겅퀴 앞에 무릎을 꿇는다. 엉겅퀴야. 엉겅퀴야. 내가 이 세상에 와서도 지은 죄 참 많다. 어려서는 모르고 지은 죄, 자라서는 어쩔 수 없이 짓는 죄, 앞으로도 시침 뚝 떼고 지을 죄... 내가 짓는 죄가 108가지가 넘는다. 이젠 더부자란 세월을 가지치기할 나이도 되었지만, 아직도 욕망은 왕성하게 세포분열을 거듭하고 있다. 시멘트 바닥뿐인 일상에도 기를 쓰고 삼독(三毒)의 잔뿌리를 내리려 한다.

엉겅퀴야. 엉겅퀴야. 도대체 내가 소멸해야 할 업장의 재고량이 얼마나 남은 것이냐? 오늘이냐? 내일이냐? 아직도 성글지 못한 이 번뇌의 꼬투리들을 과연 제대로 여물게 할 시간이 있겠는가? 또 그것을 달려드는 멥새들에게 한 줌 먹이로 던져 줄 기회가 있겠는가?

폐사지를 들락거리다 보니 보인다. 먼 아승기겁(阿僧祇劫)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가 몸과 입과 뜻으로 지어 모은 죄, 수미산보다도 크다. 송충이, 쐐기, 무당벌레들도 징그러운 얼굴, 독침 박힌 몸뚱이들 그대로 드러내고 사는데, 만물의 영장인 나는 치사량의 오욕칠정을 포장한 채, 직립보행도 답답하여 바퀴를 굴리며 조급증을 낸다. 엉겅퀴야. 나 이렇게 속도 조절을 안해도 되는 것이냐?

▲ 중금리3층석탑
어머니. 사랑하는 내 어머니를 뵌 지도 너무 오래 되었다. 살아서 오래 된 이별은 죽음과 다를 바 없고, 죽음이란 것도 사실은 이별의 시간이 좀 긴 것일 뿐인데... 엉겅퀴야. 지난번 10여년을 함께 살던 우리 집 강아지가 죽었어도 나는 사춘기 딸아이가 혹여 죽음의 세계를 엿볼까만을 두려워했고, 그의 죽음에 대한 조문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목숨이 있던 빈자리는 그 어느 것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나는 망각이란 지우개로 모든 두려운 인연의 흔적들을 지우려 한다.

엉겅퀴야. 엉겅퀴야. 너는 가시 이파를 달고도 얼굴 가득 꽃물이 번지는데, 나는 이렇게 안경 도수를 높이면서도 다초점 시력을 가져도 되는 것이냐? 폐사지의 문지방을 넘나들다보면 나도 아예 이 텅 빈 충만의 현장으로 거주지를 옮기고 싶어진다. 풀씨처럼 가볍게 날아올라 햇살의 부축을 받으며, 쑥부쟁이, 씀바귀 사이에 슬며시 세 들고 싶다.

폐사지는 그런 곳이다. 향을 쌌던 종이에서 향냄새가 나듯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에서도 향냄새가 난다. 부처님 계시던 곳은 속속들이 그 향물이 배어 이끼 낀 것이든 흙 묻은 것이든 그 어느 것도 오래도록 향 내음이 난다. 어디나 연꽃방죽인 폐사지. 비록 연화대가 깨지고 일그러졌어도 부챗살 같은 연잎 그림자가 사방에서 너울댄다.

법신은 언제나 천백억 화신으로 오시는 것이어서 팔만사천 호법 성중(聖衆)들은 눈 부릅뜨고 기다리는 것이다. 때 되면 들짐승, 산짐승 들이 모여 안거를 하고, 풀벌레, 날벌레도 모여 사경을 하거나 다라니를 외운다. 들꽃들도 철따라 옷을 바꿔 가며 색즉시공을 연출한다. 야단법석들이다.

한번 부처님을 모셨던 자리는 차마 야차, 나찰들이 범접할 수 없는 것이어서 칡넝쿨도 고개를 돌리고 물소리도 에돌아 흐른다. 무너진 금당의 문고리를 당기면 관세음보살의 현신인냥 참나리 몇 대 후불탱화로 서 있고, 마른 풀섶을 헤치면 까만 풀씨들이 사리알처럼 뒹군다. 폐사지에 가면 머무는 시간만큼 물아일여(物我一如)가 되고, 사유의 쟁기질을 하는 만큼 천지동근(天地同根)의 한 뿌리를 캔다.

잃은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 무욕의 대지인 폐사지. 열반적정이 살아서 숨 쉬는 곳. 영원한 불국토인 그곳에서 번뇌의 보따리를 풀고자 수선을 떠는 것도 죄악이다. 해탈은 부처의 것이고, 번뇌는 중생의 것일 뿐, 아무리 참회의 이름으로 업장의 찌꺼기를 씻어내려 하나, 발톱에 이끼 낀 돌거북은 두 눈을 씀벅일 뿐이다.

▲ 양주 회암사지
폐사지는 사지(寺址)일지언정 사지(死地)가 아니다. 언젠가 역사의 징검다리인 듯 점점이 놓인 주초를 사뿐히 즈려 밟고 오실 분을 기다리며 한 그리움이 또 다른 그리움을 부르는 것이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된다. 오천년 역사의 그루터기인 폐사지로 하여 이 땅은 참으로 가멸찬 날들을 증거한다. 얼마나 많은 화살이 날고 말발굽소리 들렸으면 이 땅의 모든 명당은 하나같이 부서진 절터이고, 관솔 옹이같은 사연들이 수두룩할까.

폐사지는 침향(沈香)이다. 비바람불고 파도치던 역사의 진펄에 천년을 묻어둔 침향이다. 두드리면 쇳소리가 난다. 태우면 실파와 생강 타는 냄새가 나고, 쪼개면 아득한 세월의 지층이 물무늬로 아른댄다. 폐사지는 꼭꼭 뭉쳐 둔 민초들의 원력이다. 오늘도 윤회를 거듭하는 폐사지. 어느 때는 묵정밭이었다가, 과수원이 되어 주저리주저리 법열이 영글기도 하고, 부지런한 권속들을 만나 오색단청으로 일어서기도 한다. 그러나 허명을 일으켜 세우려고 폐사지를 일으켜 세우는 수고는 부질없는 욕망일 뿐이다.

보라. 찾는 이가 없어도 문비를 활짝 열어 놓는 혜목산 고달사지 부도탑, 목계나루

▲ 장용철(시인)
청계산 낭혜원융탑, 서라벌 토함산 뒷곁 장항리 돌탑은 가을한철 도토리만 주워도 배가 부르다. 이 땅은 불교의 우듬지인 폐사지로 하여 생생한 역사의 산 교육장이다. 제행무상을 가르치기에 폐사지 만한 것이 있던가. 이 썩어도 썩지 않는 진리의 우듬지에 언젠가 다시 새움이 솟아 우담바라도 피고, 가르빙가도 날아와 둥지를 틀 것이다. 그 때까지 엉겅퀴는 엉겅퀴로 있으면 되고, 나는 부지런히 페사지의 문지방을 넘나들면 된다. 엉겅퀴야. 엉겅퀴야. 오늘도 나는 불타는 네 처소로 간다.


객원칼럼

입력 : 2006년 09월 18일 09:37:36 / 수정 : 2006년 09월 18일 09:4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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