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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아좌태자가 그린 '쇼토쿠태자상'(세계일보-0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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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1 작성일06-12-02 14:33 조회6,6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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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⑦백제 아좌태자가 그린 '쇼토쿠태자상'


<세계일보 2006/9/13/수/기획26면>



고대 일본 최초의 초상화왕실 '비공개 御物' 보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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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토쿠태자와 두 왕자상‘쇼토쿠태자와 두 왕자상’(백제 아좌태자가 그린 진본). 이 초상화는 도쿄의 일본 왕실 궁내청에 비공개로 소장 중이다(왼쪽), 지폐속의 쇼토쿠태자 일본 돈 100엔권의 앞면(위)과 뒷면. 아좌태자가 그린 쇼토쿠태자의 진본 초상(상반신 그림)을 넣은 지폐로, 1945년 8월17일 일본은행에서 처음 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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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초의 스이코 여왕(推古 592∼628년) 시대를 꽃피운 백제 불교문화가 ‘아스카(飛鳥)문화’다. 이 아스카 시대의 대표적인 또 하나의 백제인 문화유산이 있다. 일본 최초의 초상화인 ‘쇼토쿠태자와 두 왕자상’(唐形之御影)이 그것이다. 이 초상화는 세 인물이 칼을 허리에 차고 나란히 서 있는 그림으로, 가장 키 큰 쇼토쿠태자(574∼622년)가 가운데 서 있고, 어린 두 왕자가 양 옆에 서 있다. 불후의 명작으로 찬양받는 이 초상화는 현재 일본 왕실(도쿄 궁내청)에 보존되고 있는 비공개품이다.



서기 597년 백제 제27대 위덕왕(威德王 554∼598년 재위)은 아좌(阿佐)태자를 왜 왕실로 보냈다(‘부상략기’, ‘일본서기’). 이 당시 왜 왕실에 건너가서 함께 지내던 아좌태자는 그림 솜씨가 뛰어나 쇼토쿠태자와 두 왕자의 전신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쇼토쿠태자와 스이코여왕 등 왕실에서는 모두 기뻐했다.


그런데 일본 학자 마유즈미 히로미치(黛弘道)는 “왕실의 그림인 ‘쇼토쿠태자상’은 아좌태자의 그림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실은 7세기 후반 이후의 작품이다”라고 부인했다. 그의 주장은 일찍이 동양학자 나이토 고난(內藤湖南 1866∼1934년)의 다음 같은 강연(日本の肖像畵と鎌倉時代史學地理學同攻會 1920년12월)의 주장을 뒤따르고 있다.


“일본 초상화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또한 가장 유명한 것은 본래 호류지에 두었던 것으로, 현재 제실 어물(御物·왕궁 귀중물)인 당본어영(唐本の御影)이라는 ‘쇼토쿠태자상’이다. 그 상은 백제 아좌태자가 그렸다고 전하나 확실한 근거가 없고, 다만 이 그림이 지나(중국)의 육조시대 초상화 화풍을 전하고 있음은 근년이 되어 여러 가지 재료의 발견으로 밝혀지게 되었다”(‘지나회화사’ 1930년).


이런 식으로 단순하게 부정했을 따름이며, 아좌태자의 그림이 아니라는 확증 제시는 없었다. 더구나 현재 일본 포털 사이트들도 나이토 고난의 글을 인용하고 있어 걱정스럽기도 하다. 필자는 지금부터 20여년 전에 “서기 597년 백제 위덕왕 때의 아좌태자가 그린 고대 일본 최초의 인물화이다”라고 적힌 고문서(覺賢 ‘斑鳩古事便覽’)를 나라(奈良) 이카루가 터전 호류지(法隆寺) 사찰에서 발굴한 바 있다. 실제로 7세기 후반 이후에는 아좌태자의 친필 그림을 흉내 낸 ‘쇼토쿠태자와 두 왕자상’ 모사 그림이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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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토쿠태자 효양상(17세 때 모습 목조상). 교토 고류지에 있는 중요문화재(왼쪽), ‘보계(상투) 미륵보살반가사유상’. 현재 일본 교토의 고류지(廣隆寺)에 있는 오늘의 일본 국보 불상이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일본의 지폐에는 쇼토쿠태자 초상화의 얼굴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쇼토쿠태자의 초상화가 돈의 앞면에 그려진 ‘일본은행권’은 일본 패전 직후인 1945년 8월17일 처음으로 발행되어 쇼토쿠태자를 기리게 되었다(大橋義春 ‘일본지폐대계도감’ 1967년). 이 지폐 뒷면에는 호류지 사찰의 ‘금당과 오중탑’이 도안으로 인쇄되어 있으며, 현재도 이 돈은 통용된다고 하나 좀처럼 구경하기는 어렵다.


백제왕자인 아좌태자가 구다라에서 왜나라 왕실에 건너온 시기는 때마침 아스카데라(법흥사)가 8년이라는 대역사 끝에 성대하게 준공(서기 596년 11월)된 그 이듬해 봄 4월의 일이었다. 스이코여왕은 아스카데라가 준공된 것을 매우 기뻐하며 이 사실을 모국 백제와 이웃 신라에까지도 알렸다.


쇼토쿠태자의 친고모인 스이코여왕은 사신 기시노이와카네(吉士磐金·길사반금)를 신라의 제26대 진평왕(579∼632년 재위)에게 보내 아스카데라 준공을 알렸다. 그 당시 진평왕은 축하의 뜻으로 까치 두 쌍을 기시노이와카네의 귀국 길에 보내주니, 스이코여왕은 기뻐하면서 까치를 구다라스(지금의 오사카부)의 나니와 땅 ‘구다라 사당’ 숲에다 풀어주었다. 그 후에 까치가 둥지를 틀고 새끼를 깠다고 ‘일본서기’가 전하고 있다.


실은 신라에 갔던 왜나라 사신 기시노이와카네는 그 당시 나라 땅에 살고 있던 신라인 호족 가문 출신이었다. ‘길사’라는 것은 신라의 17관등 중 14번째 관등 벼슬이다. 왜나라에서도 ‘길사’ 관위의 벼슬아치 여러 사람이 역사 기록에 보이며, 이들은 한결같이 신라계 도래인들이었다. 스이코여왕은 왜나라에 사는 신라인 기시노이와카네를 사신으로 삼아 신라로 보냄으로써 나라 땅 아스카 왕실의 백제인 조정과 신라와의 친선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결과 신라의 진평왕은 왜나라 왕실로 녹나무 ‘보계(상투) 미륵보살반가사유상’(‘廣隆寺寺傳’)을 보내주었으며, 이는 일본 교토의 고류지(廣隆寺)에 있는 오늘의 일본 국보 불상이다. 일명 ‘우는 미륵’이라는 애칭이 흥미롭게 붙어 있기도 하다.


지금 고류지에는 너무나도 이름난 신라 적송나무 불상인 ‘보관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일본국보 제1호·1951년 일본문화재위원회에서 지정함)이 있다. 그 밖에 또 하나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호류지 경내의 주쿠지(中宮寺)에 봉안되어 있다. 신라 진평왕은 모두 3체의 미륵불상을 서기 603년, 616년, 623년에 각기 아스카의 스이코여왕에게 보내어 신라의 미륵 불교를 왜 왕실에 포교했다.


한편 위덕왕은 아스카데라 준공 축하 사절로서 아좌태자 일행을 직접 스이코여왕에게 보냈다. 본래 아좌태자는 성왕의 제2왕자이며, 위덕왕의 친동생이다. 서기 538년에 백제의 성왕이 왜나라 아스카 땅에다 불교를 포고한 지 장장 58년 만에 드디어 나라 아스카 땅에는 백제의 7당가람이 우뚝우뚝 섰으니 이 어찌 경하할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이 웅장한 칠당가람을 짓도록 위덕왕은 서기 588년에 사찰 건축가 등 다수의 기술진과 승려들을 아스카에 파견했고, 드디어 그 눈부신 큰 열매로서 대가람이 준공된 것이다.


왜 왕실에 간 아좌태자는 쇼토쿠태자와 곧 친숙하게 되었으며, 타고난 그림 솜씨를 발휘해서 마침내 ‘쇼토쿠태자와 두 왕자’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필을 들기에 이른 것이다. 그 초상화가 뒷날 일본 국보가 된 것임은 두말 할 나위 없고, 대대로 일본 왕실이 잘 보존하면서 오늘에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아스카 시대를 대표하며 일본 초상화의 효시로도 꼽히는 ‘쇼토쿠태자와 두 왕자상’. 이것이 백제 아좌태자의 그림이냐 아니냐를 따져 묻기 위해선 당초 이 그림을 보존하고 있던 호류지 학승의 기록을 도외시할 수 없다고 본다.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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