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조계사(주지 토진스님)는 지난 12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공연장에서 최완수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연구실장을 초청한 가운데 ‘그 시대 가장 이상적인 사람의 얼굴이 바로 불상’을 주제로 불교대학 특강을 마련했다.
최완수 연구실장은 이 자리에서 삼국시대 불상의 원류에 대해 설명하면서 “우리 선조들은 중국에서 들어온 불교문화를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새롭게 창조했다”고 평가하고 “서산마애삼존불, 태안마애삼존불 등에서 그 단초를 확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최완수 연구실장의 특강을 요약 정리했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연구실장이 지난 12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공연장에서 열린 조계사불교대학 초청특강에서 불상을 주제로 강의를 하고 있다.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문화는 물과 같다. 한쪽에 가득차면 빈 공간으로 흐른다. 대승불교는 쿠산왕조가 간다라지역을 지배했을 때 가장 번성했다. 이때 불교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파됐다. 서쪽에서 들어온 불교는 중국에서 번성해 다시 빈 공간인 동쪽으로 흘러갔다. 이러한 흐름으로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해졌다. 공식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불교가 공인됐다.
왜 이 시기에 불교가 전해졌을까. 중국 전진의 제3대 왕 부견(357∼385)은 화북을 통일하고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이어 372년 도완대사의 제자 순도를 고구려에 보내 불교를 전파한다. 백제에는 침류왕 1년(384)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최초로 불교를 전했다. 당시 백제는 진나라 동맹관계를 맺고 있고 진나라를 통해 불교가 들어왔다. 이렇게 4세기 후반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공식적으로 불교가 전해졌다.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해졌을 당시 백성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고구려의 경우 불교가 성행한 중국과 국경을 두고 있는 만큼 중국 불교문화에 흡수되는 ‘이념공동체’를 경계했다.
고구려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불교를 국교로 삼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백성들의 개인적 신앙만 존재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스님이 등장하지만, 무덤의 주인공보다 항상 작게 표현됐다. 고구려 고분에 그려진 사람은 신분에 따라 크기가 정해지는데 스님의 신분을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또 현재까지 고구려 평양성, 국내성 등 중앙영토에는 30cm 이상 크기의 불상이 출토된 적이 없다. 당시 이 크기 이상의 불상을 제작하려면 국가의 개입 없이는 조성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고구려 스님들이 박해를 피해 백제, 신라로 피신한 기록이 전해지는 것을 보면 고구려에서 불교의 위상은 높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고구려와는 달랐다. 삼국 가운데 사람 크기 이상으로 불상을 조성한 유일한 나라가 백제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는 형 비류와 압록강으로 내려와 백제를 건국했다. 백제의 지배층은 압록강 유역에서 활동했던 해양족으로 피지배층과 괴리가 심했다.
이러한 괴리감을 해소하기위해서는 공통된 이념이 필요했다. 세계적인 고등이념인 불교는 국가의 이념으로 삼기에 충분했다. 백제 역시 불교 도입 초기에는 백성들에게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당시 조성된 불상이 많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에게 위례성을 함락당하는 등 국가적 위기를 겪게 되면서 불교로부터 큰 위안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을 피해 공주로 도음을 옮겼다. 해상왕국인 백제는 어떻게 해서든 서해 북부 제해권(制海權)을 찾으려 고민했다.
 
그 시대 가장 이상적인 얼굴이 바로  ‘불상’이다
501년 왕위에 백제 무녕왕(462~523)은 제해권 장악을 위해 선단 복구에 열을 올린다. 배를 만드는 작업은 삽교천 상류에 있는 예산 인근에서 진행됐다. 무녕왕은 이곳에 사면불상을 조성해 국력을 기울였다. 현재는 보물 제794호로 지정된 사면불은 남쪽 면에는 여래좌상의 주존불이, 동, 서, 북 3면에는 여래입상이 120cm 내외 크기로 조성되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석조사방불이라고 할 수 있으며 백제미술사상 중요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국운을 걸고 선박을 만든 이곳은 백제국력의 집결지였다.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 불상도 이 지역에서 조성돼 보내졌을 것이다. 사면불의 모습은 무녕왕의 초상이라고 생각한다.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도 같은 계열의 모습이다. 당시 조성된 부처님의 얼굴은 백제왕실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백제 국력이 신장되면서 기지가 태안으로 옮겨졌고 태안마애삼존불이 조성됐다. 태안반도는 문화선진기지이자 군사요충지였던 만큼 자연스럽게 백제에서 문화능력이 탁월한 지역으로 여겨졌다. 태안마애삼존불은 성왕의 초상조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왕은 신라에 불교를 전하며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신라에 배신을 당하며 피살됐다. 백제 백성들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성왕이 다시 미륵으로 환생하기 간절히 기원하며 도솔천의 미륵보살로 표현했다. 당시 백제와 신라에는 미륵신앙이 팽배했다.
신라는 법흥왕 14년(527)에 불교를 공인했다.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불교를 받아들인 신라는 보수적이고 단결력이 강해 외부문화에 대한 거부가 심했다. 이차돈의 순교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불교가 점차 확산되면서 신라의 기반문화로 빠르게 정착됐다. 현재도 불교신앙이 뿌리 깊은 지역이 바로 경상도다.
우리 선조들은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그대로 흉내 내지 않았다. 반드시 창조적 생각을 가미해 새로운 문화를 창조했다. 태안마애삼존불, 서산마애삼존불 등 백제시대 조성된 마애불에서 단초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서산마애삼존불은 당시 유행하던 불교이념을 간단명료하게 담아냈다. 간단한 요점원리만 추출해 능숙하게 혼합, 제3의 문화로 재창조했다.
백제의 미륵신앙은 신라에도 그대로 전해졌다. 신라에서 여왕의 출현은 모계사회의 영향이 아니라 미륵신앙의 영향이라고 여겨진다.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의 이름은 정반왕, 어머니는 마야부인이다. 부처님은 정반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륵불이 하강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신라는 미륵사상으로 삼국을 통일하려다 실패하면서 신앙의 형태도 변하게 된다. 원효대사의 정토사상이 등장한다. 통일신라는 흉흉한 민심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하는 신앙이 필요했다.
더불어 당나라에 수학한 의상대사는 화엄종을 개창했다. 의상대사는 부석사 주불을 아미타불로 모셨다. 기존 정토사상을 그대로 수용해 화엄종 주불인 비로자나불이 아닌 아미타불을 수용한 것이다. 화엄종이면 반드시 비로자나불이라는 원칙을 깨고 필요한 신앙대상을 선택했다. 이후 화엄종은 주불로 아미타불을 모셨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해 문화의 절정기를 맞은 것은 성덕왕(?~737)때부터다. 이 시기는 불국시대라 부를 만하다. 성덕왕의 아들 경덕왕은 아버지를 추모하며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했다. 석굴암의 주불은 성덕왕의 초상조각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불국사는 불국토를 그대로 재현했고 석굴암은 한민족의기량이 한껏 발휘된 세계 제일의 조각이다. 석굴암에는 이전까지 모든 불교이념이 함축적으로 집약돼 있다. 신라인들은 <법화경>, <화엄경>, <유마경> 등 불교경전의 이념을 정확하게 이해해 조각으로 완벽하게 창조했다. 그래서 석굴암이 유명한 것이고 세계최고인 것이다. 동시대에 지어진 다보탑, 석가탑도 마찬가지다.
고려 초기에는 호족세력이 각 지역에 활동하고 있어 중앙권력이 미약했다. 광종은 미약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불교를 활용했다. 길가에 불상을 크게 조성해 위엄을 보이려 했다. 당시에는 조형미를 생각할 겨를이 없이 크게만 만들었다. 불상의 모습도 험상궂은 표정이 대부분이다. 불상조성 역사상 가장 표정이 험상궂을 시기가 바로 고려 광종 때다. 호족들의 자제들이 과거를 통해 중앙귀족을 형성하면서 문사들이 대거 배출된다.
이런 가운데 합리적 철학체계를 강조한 법상종이 자연스럽게 부상한다. 왕족들이 법상종으로 출가하기도 했다. 예산 가야사(가야사지)를 비롯해 보은 법주사, 원주 법천사 등이 대표적 사찰이다. 이곳에서 나온 불상 등 불교유물은 화려하다. 가야사지에서 화려한 유물이 출토될 것이다.
고려 문종이 재위하면서 불상은 온화한 모습을 찾게 됐다. 이후 무신의 난으로 집권한 최씨정권은 조계종의 사상을 주도이념으로 삼았다. 이때 만들어진 불상을 비롯한 불교미술품은 관능적이고 거대하고, 화려해 대중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 최완수 연구실장은…
1942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최완수 연구실장은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65년 국립박물관에서 근무한 후 1966년부터 현재까지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을 맡고 있다.
그동안 서울대, 동국대, 연세대, 이화여대 등에서 전통문화의 정수를 가르쳤다. 지난해 제21회 위암장지연상과 우현학술상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는 <불상연구>, <명찰순례>, <추사집>, <그림과 글씨> 등이 있다.
[불교신문 2744호/ 8월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