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내포 가야산 불교 성역화 첫발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1-07-01 09:17 조회6,461회 댓글0건본문
충남 내포 가야산 불교 성역화 첫발
내포 가야산 성역화 불사의 핵심인 보원사지. 한때 승려 1000명 등 3000여 명의 대중이 모여살던 대가람이지만 폐사지의 정적과 고요만이 감돈다. 예산·서산=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내포 가야산 성역화 사업을 이끄는 세 스님이 서산마애삼존불의 ‘백제 미소’ 앞에서 결의를 다지고 있다. 가운데가 덕숭총림 방장 설정 스님, 왼쪽이 수덕사 주지 지운 스님, 오른쪽이 조계사 주지 토진 스님.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예산 가야사를 불태운 뒤 금탑 자리에 조성한 아버지 남연군의 묘소. 무덤 바로 앞에 커다란 너럭바위들이 떡 버티고 있어 거센 기운이 느껴진다.
경주 남산이 ‘승리한 불교’의 정사(正史)라면, 내포 가야산은 ‘패배한 불교’의 야사(野史)다. 그래서 경주 남산의 신라 부처님들은 수려하고 귀족적인 모습이고, 내포 가야산의 백제 부처님들은 소박하고 서민적인 용모다. 한국 불교계가 역사의 그늘에 묻힌 내포 가야산의 성역화 작업에 본격 뛰어들었다. 한국 근대 선불교의 정신적 지주인 경허 만공 스님의 법맥이 이어져 내려오는 덕숭총림 수덕사와 조계종 본산인 서울 조계사가 중심에 섰다. 문중을 달리하는 서울과 지방 사찰이 한마음으로 불사를 추진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스님과 신도들이 가야산 성역화 사업의 ‘출정식’을 이곳에서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터가 바로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가야사 금탑(석탑인데 상륜부가 반짝거리는 탑) 자리를 불태우고 아버지의 묘소를 쓴 곳이기 때문이다.
황현이 쓴 ‘매천야록’ 등에 따르면 이하응이 ‘상갓집 개’처럼 지내던 시절 지관 정만인이 찾아와 덕산 땅에 ‘자손만대 영화를 누리는 자리’와 ‘2대에 걸쳐 천자(天子)가 나올 자리’가 있으니 둘 중 한 곳에 부친의 묘소를 쓰라고 했다. 왕권 회복의 야심에 불타 있던 이하응은 망설임없이 후자를 택했다.
그는 우선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절골에 임시 묏자리를 정해 아버지 구(球)의 묘소를 이장해 왔다. 이후 재산을 처분한 2만 냥의 반을 주지에게 주고 절에 불을 질러 폐사를 만든 다음 부친의 유해를 봉안했다. 내심 꺼림칙했던지 묘 맞은편 산기슭에 아담한 절을 짓고 보덕사라는 이름을 내렸다.
묘를 옮긴 지 7년 후 차남 명복(命福)을 낳고, 그가 12세에 왕이 되었다. 그가 고종이고, 아들 순종을 끝으로 조선왕조가 막을 내렸으니 과연 2대에 걸쳐 왕이 나온 셈이다. 그 와중에 대원군은 며느리와의 권력 다툼으로 실각하고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가는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다. 멀쩡한 절을 불태웠으니 부처님의 노여움을 산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1868년(고종 5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이 무덤을 파헤치려다 미수에 그쳐 대원군을 분노하게 했고, 이는 쇄국과 천주교 탄압으로 이어졌다.
덕숭총림 방장 설정 스님은 “내포 가야산 성역화 사업은 단지 절과 불상 등 불교 유물을 지키자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근본에 대한 통찰과 생명 생태의 수호 차원에서 발원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행사를 마친 스님과 신도들은 폭염 속에 가야사터에서 보원사터에 이르는 산길 5km를 걷는 ‘백제 미소길 걷기 행사’를 하면서 결의를 다졌다. 예산과 서산을 연결하는 이 길은 가야산을 관통하는 도로로 조성될 예정이었으나 불교계가 저지했고 현재 ‘백제 미소의 길’이라는 이름을 붙인 친환경 생태도로로 조성 중이다. 인근 주민들은 도로 건설이 저지된 것에 대해 실망과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내포 가야산 성역화 사업의 핵심은 이 일대 최대 사찰이었던 보원사 복원과 서산마애삼존불(국보 제84호) 관리권 이양에 맞춰지고 있다. 불교계는 장기적으로는 내포 가야산 일대의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 등재를 추진할 방침이다.
서산시 운산면 용현계곡 초입에 자리 잡고 있는 보원사는 통일신라시대 화엄십찰 중 하나로 고려 광종 때 왕사였던 법인국사가 머물렀다. 지금은 중앙에 5층 석탑을 비롯해 석조(石槽·보물 제102호)와 당간지주(보물 제103호), 법인국사보승탑과 비(碑), 주춧돌 부재 등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 출토돼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인 국내 최대 고려철불좌상(높이 257cm, 좌폭 217cm)과 석굴암 본존불과 양식적으로 깊은 연관이 있는 철조여래좌상(높이 150cm, 무릎너비 118cm, 두께 86cm)의 면면에 비추어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1987년 사적 제316호로 지정됐으며 수덕사주지와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법장 스님이 약간의 땅을 매입해 수덕사 말사인 보원사를 지어 스님이 상주하도록 했다. 현재는 가건물 수준이다. 불교계는 문화재청, 서산시 등과 협의해 보원사의 복원 불사를 추진해 나갈 방침이다.
점심 공양을 마친 스님 신도들은 1km가량 떨어진 서산마애삼존불로 이동해 육법공양과 참배를 마쳤다. 이곳에서 행해진 최초의 공식 불교 의식이다. 석굴암과 갓바위 부처님은 불교계가 관리하고 있으나 1959년 발견된 서산마애삼존불은 서산시가 관리하고 있다. 그동안 모든 종교 행위가 이뤄지지 못했다.
폭염에도 등산화 차림으로 내내 행렬을 이끈 설정 방장 스님은 인사말 도중 몇 차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수덕사 주지 지운 스님은 “우선 불교계가 아침과 저녁 예불이라도 제대로 드릴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절에서 마애삼존불의 관리와 운영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계사 주지 토진 스님은 “부처님은 절에 계시고, 공무원이 아니라 스님과 신도들이 모셔야 한다”고 거들었다. 행사를 마친 참석자들의 얼굴에 자애로운 ‘백제의 미소’가 번져 나갔다.
예산·서산=오명철 문화전문기자 oscar@donga.co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