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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큰스님의 제자 수월선사 이야기(조선일보 07/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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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수보리 작성일07-02-22 14:32 조회6,3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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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水月 선사

이선민 논설위원
smlee@chosun.com
입력 : 2007.02.15 23:02




1910~20년대 두만강 건너 간도(間島)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주먹밥을 뭉치고 짚신을 삼아 들판과 길목에 놓아 두곤 했다는 스님에 관한 것이다.


배가 고파, 혹은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해 국경을 넘는 조선사람이 먹고 신고 가라는 뜻에서다.
예순을 넘긴 스님은 낮에는 밭 갈고 나무하고 밤에는 짚신을 삼거나 주먹밥을 뭉쳤다.
일하지 않는 시간에는 영험(靈驗)하다는 대비주(大悲呪)를 외웠다.




▶만주의 마을들이 기르던 ‘만주개’는 몹시 사나웠다.
낯선 사람이 마을에 들어서면 떼로 달려들어 물어 죽였다.
그래서 밤길 다니는 것이 금기였다. 스님은 예외였다.
그가 나타나면 개 수십 마리가 무릎을 꿇고 반겼다.
까치 꿩 노루 토끼 같은 산짐승 날짐승도 모여들었다.
그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먼 길을 달려갔던 청담(靑潭) 스님이 전한 이야기다.





▶이 스님이 수월선사(水月禪師·1855~1928)다.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머슴살이를 하며 자랐다.
하룻밤을 묵어간 탁발승에게서 수행 이야기를 듣고 감명 받아 28세 때 서산 천장암을 찾았다.
그를 수행자로 만들어 준 스승은 선불교(禪佛敎)를 중흥시킨 경허(鏡虛·1849~1912) 스님이다.
그는 후배 혜월(慧月), 만공(滿空)과 함께 ‘경허의 세 달’로 불린다.





▶수월 스님은 천장암에서 깨달음을 이룬 뒤 금강산 지리산 오대산 묘향산에서 수행하며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가 자는 집에서 불기둥이 솟아오르는 ‘방광(放光)’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글을 모르는 그는 설법이 아니라 행동으로 사람들을 감화시켰다.


갑자기 종적을 감춘 경허 스님을 찾아 함경도 갑산으로 들어간 그는
스승이 세상을 뜨자 소식을 만공 스님에게 알린 뒤 두만강을 건넜다.





▶수월선사는 한국근대불교사에 빛나는 고승이지만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이름이 널리 떨치지 않음을 아쉬워하던 옌볜(延邊)지역 불자(佛子)들이
옌지(延吉)에 수월선사 추모 사찰을 짓겠다고 나섰다.



우리 불교계가 가만있을 수 없다.
건립추진위 상임대표를 맡아 모금을 시작한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은
“우리 불교사(史)를 복원하는 일이자,
중국과 조선족 동포에게 불법을 전하는 뜻 깊은 불사(佛事)”라고 말했다.


‘북녘의 상현(上弦)달’ 수월 스님의 법력(法力)이 새삼 놀랍다.




수월스님의 삶과 죽음





허물 벗듯 육신 벗은 수월의 감로법문



-한림대 오진탁 교수



이승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평생 동안 중생들을 봉양했던 수월(1855년 - 1928년)은 한 마디 설법도, 한 줄 문장도 남기지 않았지만, 언제나 주위에는 선열이 넘치고 법열로 가득 차서 스님이든 일반인이든 심지어 호랑이를 비롯한 동물들까지도 환희에 넘쳤다.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았던 삶의 행적은 진리의 빛 그 자체였고, 지혜와 자비의 본디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낸 삶과 죽음이었다.





충청도 홍성 땅에서 태어난 수월은 어려서 부모를 잃은 뒤 부잣집에 들어가 머슴살이를 하며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 형제, 친구, 스승, 그 누구도 없이 자기 혼자서 살았다. 버릴 것도 떠날 것도 갖지 않고 젊은 날을 보냈던 그는 나이 서른 가까운 어느 늦가을 밤 탁발승이 해준 수행 이야기에 감화를 받아 출가수행을 결심한다.




그의 삶은 아무래도 육조 혜능을 닮았다. 나뭇꾼 출신인 데다가 키도 작고 볼품없던 그는 종일토록 일만 하면서 일념으로 ‘대비심다라니’만 외었다.



수월은 사미계를 받던 해 이레 동안 용맹정진을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열다섯 해 동안 머슴일을 통해 업장을 맑혔고 다시 3년 동안 행자 수업을 통해 준비를 했다.





이레째 되던 날 밤 아랫마을에서 ‘불이야’ 하는 외침과 함께, 느닷없는 종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 퍼졌다. 마을 사람들은 빗자루, 괭이, 삽 같은 것을 들고 뛰어 나왔다. 불길은 연암산 중턱 천장암 근처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불기둥은 엄청났다. 온 산골짜기를 밝혔고 불꽃은 다시 하늘 위로 솟구쳐 연암산 너머까지 번졌다. 그 불꽃은 두려움이 아니라 환희와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 .




수행자의 몸이나 성물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방광(放光)이라고 한다.


이후에도 지리산 천은사 보광전, 지리산 우번대 등에서도 방광을 했던 수월은 세 가지 특별한 힘을 얻었다.





첫째 불망념지(不忘念智), 한번 들은 내용을 다시 잊어버리지 않는 지혜,


둘째 잠이 없어졌고, 셋째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능력을 인연 따라 쓰기만 했을 뿐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글도 모르는 선지식, 볼품 없이 생긴 선지식, 나이도 새파란 조실, 법문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조실,


수월은 낮에는 산에 들어가 나무하고 밤에는 절구통처럼 오롯이 앉아 온밤을 밝혔다.



1928년 무진년 여름, 일흔넷이 되던 해 여름 결제를 며칠 앞두고 수월은 나무하기를 마쳤다.


해제 다음날 점심 공양을 끝내고 대중들과 함께 찬 한 잔 마신 뒤


“나, 개울에 가서 몸 좀 씻을 텨” 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얼마 쯤 시간이 지난 뒤, 개울가로 빨래하러 간 스님이 부리나케 달려와 숨넘어가는 소리로 수월이 개울가에 앉아 열반에 들었다고 말했다. 목욕을 마친 수월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개울가 바위 위에 단정히 앉은 자세로 입적했다. 머리 위에는 잘 접어서 갠 바지저고리와 새로 삼은 짚신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자연스런 결가부좌, 곧게 쭉 편 허리와 가슴, 고추 세운 머리, 살짝 감은 듯한 눈, 야물게 다문 두 입술, 배꼽 아래 함께 포개져 있는 두 손, 닿을 듯 말듯 붙어 있는 두 엄지손가락, 누가 보아도 죽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흡사 더운 여름 날 매미 소리를 들으면서 개울물에 몸을 씻은 노스님이 잠시 바위 위에 앉아 삼매를 즐기는 그런 모습으로 수월은 육신의 옷을 벗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지닌 죽음에 대한 오해와 편견, 그리고 불행한 마지막 모습과 비교해 보면, 수월의 이런 당당한 죽음은 하늘과 땅처럼 느껴진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죽음이 가능한지 사람들은 의아해 할 것이다. 역으로 수월의 자리에서 보면, 사람들의 불행한 죽음 역시 이해하기 어렵다.



수월은 잠시 인간의 옷을 입고 중생의 아픔을 어루만지면서 지내다가 허물 벗듯이 육신의 옷을 벗고 가볍게 길을 떠났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평등하건만, 죽음의 모습만큼 차이가 나는 것도 없다.





수월이 입적한 뒤 밤마다 호랑이들이 떼를 지어 울었고 빛기둥은 밤마다 하늘 높이 치솟았다. 사람들의 안타까운 삶의 모습, 건강하지 못한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수월의 삶과 죽음에서 한 줄기 광명, 결코 끊이지 않는 맑은 감로수 법문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2005-08-24/816호>


입력일 : 2005-08-23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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